서울원문화해설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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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의 탄생
  • 박혜현 교도
  • 승인 2019.08.07 10:59
  • 호수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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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함께 떠나는 대종사의 경성교화(1)

[한울안신문=박혜현 교도] 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과 수도권의 교화는 원기9년(1924) 3월30일 첫 상경으로부터 시작된다. 대종사께서는 원기9년부터 열반하신 원기28년 4월 마지막 상경까지 19년 동안 무려 100회 이상 경성을 다녀가셨고, 어느 때는 50여 일 이상 머문 적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서울 곳곳엔 대종사의 귀하디귀한 행적과 정신개벽의 에너지 넘치는 법문들이 많이 있다.

그동안 묻혀있던 원불교 서울 성적지는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가 있었던 원기101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원문화해설단의 탄생도 이와 때를 같이 한다. 5개월간 원불교 역사, 인물사 등을 공부한 후 해설 실습을 거쳐 해설사가 되어, 성적지를 발굴하고 관리하며 열정과 감동으로 교도들의 서울성적지 순례를 돕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1924년 첫 상경하실 때 이용한 남대문 정거장(경성역 옛 이름) 

현재 발굴된 서울 성적지는 ▷북촌코스(은덕문화원-성성원선진 집터-이공주선진 집터-이동진화선진 집터-시민선방) ▷낙산코스(동대문 부인병원터-경성출장소 창신동 회관-낙산공원-낙산 정상-경성지부 돈암동회관터) ▷남산코스(태평여관터->전재동포구호소터-서울역-남산공원-정각사터(한남동 수도원터) 등 세 곳이다.

현재까지 3000여 명의 교도들이 정성스럽게 순례에 함께했고, 순례를 다녀간 많은 교도들은 대종사께서 수도 서울에 쏟은 정성의 흔적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앞두고 익산 총부(당시 불법연구회)를 짓기도 전에 첫 상경 길에 올라서 한 달간 머물렀다. 그 후로도 100회 이상 서울을 다녀갔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대종사의 10대 여성 제자 중 일타원 박사시화, 육타원 이동진화, 팔타원 황정신행, 구타원 이공주 선진을 서울에서 만나, 사요의 남녀권리동일(자력양성)을 설하며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찾도록 권장했다. 경성은 교단 초창기 여성제자들을 모아 정신개벽의 지도자로 키운 곳이며, 현재 교단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러 법규와 제도를 미리 실시해본 곳이다. 또한 최초 지방 교화지였으며, 교단 최초 신축교당이 설립됐던 곳이다. 무엇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경성의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보며,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조화를 이뤄야 참 문명세계가 올 것이라 예견했다. 대종사 스스로도 근대 우편으로 제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전차와 자동차, 비행기를 이용했으며, 원기11년에 이미 부기회계를 교단에 도입하는 등 편리와 유익을 주는 물질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렇듯 경성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인적·물질적·대외적으로 중요한 교화지였으며, 경성 제자들의 왕성한 공부심과 이소성대의 사업능력은 일원의 진리를 만 천하에 드러내려는 대종사께 크나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1925년 신축한 경성역(현 서울역)
현재 서울역 모습

서울원문화해설단 해설사로서 4년 정도 활동하면서 교단이 이제야 서울 성적지를 알아보고 세상에 드러냄에 대종사와 여러 선진들께 죄송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앞으로 연재할 ‘서울원문화해설단과 함께 떠나는 대종사의 경성교화’는 소태산 대종사와 경성 제자들의 새 회상 건설을 위한 절절한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보고, 숙세의 귀한 인연들이 만나는 과정 그리고 그들에게 내려준 법문 등을 서울성적지 코스와 함께 더듬어 보고자 한다.

글_박혜현 교도·정릉교당/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8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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