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삶, 못난 삶, 그저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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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삶, 못난 삶, 그저 그런 삶
  • 전정오 교도
  • 승인 2019.08.14 02:06
  • 호수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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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전정오 교도
분당교당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부모들 역시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본인들의 삶을 희생한다. 그런데 속세에서 성공이란 개념은 좋은 학교를 나오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때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본 성공을 위해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삶을 도외시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극심한 심적 고통 속에서 살았다면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소위 출세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현직에서 물러나고 나면, 지나온 삶에 회한의 소리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필자의 친구 중에도 늘 밝고 적극적이던 사람이 최고위급 공무원으로 은퇴한 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사람들을 기피하고 은둔생활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올라갈 줄만 알았지 내려갈 준비가 전혀 안 된 것이다.

언젠가 그 친구가 필자에게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너는 점심식사 약속을 할 때, 편안한 사람과 하니, 아니면 불편한 사람들과 하니?” 하고 물었다. 그 친구 지론은 편안한 사람들은 내 미래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고, 이해관계가 있고 나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당장은 불편한 사람들이란 것이었다. 그 친구는 밥 먹는 것조차 이해관계를 따져가며 먹었으니 참 힘들었을 것 같다.

그 친구는 출세를 위해 열심히 산 결과,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위직까지 갔으니 한편으론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은퇴 후 상실감을 견디기가 어려워 친구들마저 기피하고 살고 있으니 그의 성공이란 것이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은퇴 전 생활이 화려할수록 은퇴 후 삶은 더 힘들어지기 쉽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는 종(種)은 강한 종이나 똑똑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라고 한다.

이제 60이 넘고 보니 우리의 삶에는 그리 잘난 삶도, 못난 삶도, 그저 그런 삶도 없는 것 같다. 시절이 지나고 나면 그 기준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편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종사님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많은 고행의 결과 깨달음을 얻었으니 성자로서 숭앙을 받는 것이다. 만약에 구도의 고행 길에서 깨닫지 못한 채 그대로 열반했다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 정의한 이후 사람들은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되었다. 그런데 지나친 행복의 추구는 자칫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기쁨과 분노, 혐오와 공포, 슬픔과 놀람 등 희로애락의 원시적 감정 속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10번 중에서 6~7번만 행복함을 느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10번 모두 행복하려고 하면 그것은 강박증이 되어 또 다른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삶은 그 자체가 삶일 뿐, 잘난 삶도 못난 삶도 그저 그런 삶도 없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란 말씀이 가슴에 다가온다.

8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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