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인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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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인연을 찾아서
  • 박혜현 교도
  • 승인 2019.09.03 22:41
  • 호수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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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2
박사시화, 박공명선 선진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
북촌코스 성성원의 집

 [한울안신문=박혜현 교도] 소태산 대종사의 첫 상경은 원기9년(1924) 3월30일이다. 최도화의 안내로 대종사는 송규·서중안·전음광과 함께 경성역에 내리는데 이때가 경성 교화의 시작이다. 일행은 서울에 연고가 없었으므로 경성역 앞 지금의 세브란스빌딩 근처에 있는 태평여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다음 날 최도화는, 1년 전 지리산 화엄사에 불공하러 가는 박사시화를 기차에서 만나 전라도 생불님(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생불님 뵙기를 원했던 계동에 사는 박사시화를 데려와 일행에게 인사를 시킨다. 대종사를 만나본 박사시화는 쌍둥이 동생 박공명선의 외동딸(성성원) 집으로 대종사 일행을 모시게 된다.

성성원의 집에서 대종사 일행은 3일간 머무는데, 이때 박사시화·박공명선 자매가 대종사와 사제의 연을 맺고 경성의 첫 제자가 된다. 이후 박사시화는 전무출신까지 서원한다. 상경한 지 이틀 만에 박사시화와 박공명선을 제자로 맞이하며 대종사의 경성교화는 탄력이 붙게 된다. 당시 서중안과 전음광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인 당주동에 있는 20여 칸의 가옥을 1개월 한정으로 빌려 대종사 일행의 거처로 삼았다. 이곳이 당주동 경성 임시출장소이다. 이때 시봉은 박사시화·박공명선 자매가 담당했다.

북촌 일대에서 바느질을 하던 박사시화는 가회동에 살고 있는 이동진화를 당주동으로 데려와 대종사께 소개를 했다. 이동진화의 비범함을 알아본 대종사가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 성불하는 일이고,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창생을 건지는 일이다”(인도품 6장)고 법문을 내렸다. 이동진화가 감화를 받아 그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며 대종사께 귀의한다.

훗날 이동진화는 창신동 서울출장소를 희사하여 경성 교화의 발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전무출신으로 출가해 교단 초창기 힘든 교무들의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한다. 이동진화는 자신의 침모인 김삼매화와 살림을 도와주는 최강동옥까지 대종사께 인도했다. 이처럼 박사시화, 이동진화 외의 대여섯 명의 제자와 인연을 맺은 대종사는 한 달간의 경성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리(현 익산)로 귀가했다. 대종사가 첫 상경길에 만난 이동진화와 김삼매화의 입교 예화 외에 당시 함께했던 제자들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이동진화는 대종사 일행이 떠난 후에도 성불제중에 대한 법문을 하며 ‘어찌 그런데 있소? 큰일 해야제’라는 대종사의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수소문 끝에 만덕산에서 제자들과 선을 나고 있는 대종사를 찾아가 20여 일간 선 정진을 한 후 상경한다. 이를 지켜본 남편은 수양은 서울에서도 할 수 있다며 창신동에 수양채를 마련해 주니, 김삼매화, 최강동옥과 함께 창신동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경성 제자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한다.

만덕산에서 한 달간 선을 마친 대종사는 원기9년 8월~11월 익산군 북일면에 불법연구회(총부)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던 중, 11월 중순경 “경성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며 갑자기 2차 상경해 창신동 이동진화 수양채로 찾아간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총부 건설 중, 급히 상경해 만났던 그 인연은 누구일까?

글/박혜현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9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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