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은 사용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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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은 사용하는 것
  • 라도현 교도
  • 승인 2019.09.03 22:57
  • 호수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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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현 교도의 공즉시색4

[한울안신문=라도현 교도] “금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며, 진흙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 참부처는 안에 앉아있다(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 泥佛不渡水. 眞佛內裏坐).” 조주스님( 778-897)

오랜 세월 불자들은 부처를 우러르며 한결같이 그 형상을 만들어서 기리지만, 그것은 참다운 부처일 수 없습니다. 참 부처는 도리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원상을 단지 높이 받들기만 한다면, 등상불을 물리고 일원상을 세운 대종사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2천 년 넘게 내려온 등상불을 일원상으로 바꾼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이 일원상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일원상은 부처의 마음이며, 나의 본성입니다. 나의 본성이 이미 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면, 이것은 내가 받들어야 할 물건입니까, 사용해야 할 물건입니까? 일원상이 본래 밖에 있는 것이라면 받들 수도 있겠지만, 내 안에 있다면 이것은 써야 할 물건입니다.

중국 한(漢)나라 때 소장(蘇章)이라는 관리가 어느 지역에 감찰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사건들을 훑어보다가 한 고을의 태수가 몰래 뇌물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태수는 자신의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날 저녁 소장은 주안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친구를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지난날을 회고하며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이윽고 태수가 돌아가면서 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늘이 하나뿐인데, 나에게만은 하늘이 둘이로세!”

소장이 대답했습니다. “오늘 저녁 즐거운 술 자리를 가진 것은 자네와의 우정 때문일세. 하지만 내일 아침 감찰사로서 등청(登廳)을 하면 자네 사건은 법에 따라 집행할 것이네.”

과연 소장은 다음 날 그 사건을 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했습니다. 소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일원상을 온전하게 사용했습니다. 뜻밖의 어려운 경계에서도 그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일원상을 사용했습니다. 일원상은 이렇게 실제로 쓰여질 때 그 빛나는 가치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처럼 일원상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일원상을 아주 멀리 있는 숭고한 무언가로 생각해서, 내가 쓸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언제나 착(着)을 내려놓지 못하고 상(相)을 떨치지 못해서 일원상이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경계에 끌려서 쉬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한순간도 마음이 활짝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른바 성성적적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에 활짝 깨어[惺惺] 있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저절로 고요[寂寂]해집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만 말고 활짝 깨어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지금 이 순간에 무엇보다도 깨어있는 마음을 강조하는 수행이 불교의 위빠사나이며, 지금 서양에서 크게 유행하는 마인드풀니스(마음챙김)입니다.

금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며, 진흙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 부처는 우리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참 부처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이생에 불법 만난 보람을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화정교당 라도현 교도

9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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