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서툰한글로 교전·일기 쓰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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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서툰한글로 교전·일기 쓰는 기쁨
  • 우형옥 기자
  • 승인 2019.10.23 18:57
  • 호수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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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의 향기 / 안산교당 김영진 교도

[한울안신문=우형옥 기자]  “우리가 놋양푼을 정성드려 닦고 또 닦그변 내 얼굴이 보이듣 중생이 원불교를 알고 진리를 믿으면 ….”

“원기103년 10월1일…. 경계가 올 때 미움을 사랑으로 돌리며 만사가 혜결대면 행복으 문이 열리리…할미가 만코만은 사람중에 너가 이글일 진심으로 보고 배워 실천하기 빈다 사랑하는 손자 허제영아.”

새하얀 머리. 88년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주름진 손. 그 손으로 건네는 수권의 일기장과 꾸깃한 편지 여러 장에는 삐뚤빼뚤 맞춤법은 틀렸지만 그 진심이 꾹꾹 눌려진 글씨들이 천지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연신 “나에게 공부할 힘을 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던 안산교당 김영진 교도를 만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오십 세가 넘어 원불교를 알게됐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여동생의 소개로 찾은 서울교당에서 그는 한눈에 이 법이 내 평생의 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삼각지에 교당(서울교당)이 있다는 거예요. 물어 물어서 교당에 갔더니 세상에 교무님에게서 서기가 비쳐요. 너무 좋아. 글 읽을 줄 몰라도 설법이 마냥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 옛날에 흑석동 저 꼭대기 살 때, 산바람이 살을 에워도 새벽 4시만 되면 새벽 기도를 갔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갔어요. 그때는 흑석동이 비나 눈이 오면 질퍽여 발이 빠져요. 옛날엔 버선을 신잖아요. 그러면 그 언 발로 교당에 가는 거 예요. 근데 법당에 들어가면 발이 하나도 안 시려와. 이 법이 그렇게 신기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궂으나 좋으나 다니는 거예요.”

무슨 인연이었을까. 당시 흑석동에 살며 입교한 그는 서울회관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파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죽기로써 교당에 다녔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써낸 일기
“14살 때 어머니가 창호지에 자음 모음 한번 써주고는 그 뒤로 한글을 배운 적이 없어요. 가난하게 살 때라 시집도 일찍 가서 남편 말이면 다인 줄 알고 애 키우고 밥하며 살았죠.”

여자라는 이유로, 가난을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그는 교전을 잘 읽지 못했다. 사는 게 급급하고 쫓기다 보니 글을 배우지 못한 것에 서운함을 느낄 새도 없이 살아온 세월, 오로지 설법이 좋아 공부하고 검은콩, 흰콩을 세며 다녔다. 그런 그가 서툴지만 사경을 하고 일기를 써온 지 벌써 5년이다.

“80이 넘은 어느 날, 일기가 쓰고 싶고 교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용기가 안 나요. 적기는 했는데 내가 쓰고 읽어도 뭔 소린지 안 내려가. 그래서 처음에는 쓰고 버렸어요. 근데 우리 선생님, 김선지 교무님께서 부임하고 내가 창피를 당해도 한 번은 내야 공부가 되겠구나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부끄러움을 이긴 용기는 그를 진리전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가게 했다.

용기를 읽어준 스승
“처음으로 일기를 써서 냈을 때 만약에 교무님이 건성으로 읽고 그냥 넘어갔다면 지금까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교무님이 엉뚱한 단어에 맞춤법도 다 틀린 그 읽기 힘든 걸 더듬어서 반듯하게 읽어 잘 했다고 얘기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신심을 이어갈 힘을 주셨어요.”

그는 여든이 넘어 한글을 배우고 아흔이 다 되어가는 이때까지 일기를 쓰고 훈련을 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그를 지지해준 스승을 만난 것이라며, 그도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단다.

“나처럼 바보같이 살지 마이소. 배우지 못함을 후회하고 자시고 할 거 없어요. 사는 게 급급해도 그냥 교당에 나오세요. 생각이 나는 그대로 적다 보면 콩이 물을 먹고 콩나물이 자라듯이 자연적으로 진리에서 이끌어주셔요. 그냥 신심이 나요. 우리 인생이 그래요.”

내 죽고 나서라도 믿어 주기를

그는 사경과 일기로 글이 많이 늘어 이제는 수준급 일기를 쓰고 있다. 보청기를 잃어버렸다 찾아 감사한 마음에 적은 ‘영진이를 기다리는 보청기’라는 제목의 일기는 인터뷰 장소를 훈훈한 웃음으로 물들였다. 비우지 못했던 마음도 일기를 통해 다잡고 텅 비운다는 그는 이제 남은 삶의 목표라곤 딱 두 가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법 잊지 않고 감히 이 법 그림자라도 따라가고 싶어요. 두 번째로 내 아이들도 함께 이 좋은 법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우리 애들이 교당을 안 다니는데 그게 너무 안타까와요. 이 법이 얼마나 좋은지 알려주고 싶어서 시간 날 때마다 공책에 좋은 법문과 편지를 써서 모아요. 내가 죽고나서라도 이 편지와 법문을 보고 그 소중함을 알아 신심이 났으면 합니다.”

내가 죽고 나서라도 믿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 만한걸까. 그는 오늘도 서원의 펜을 든다.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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