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과 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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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과 생선
  • 라도현 교도
  • 승인 2019.11.12 23:45
  • 호수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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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9

노(魯)나라의 재상이 된 공손의(公孫儀)는 생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다퉈 생선을 갖다 바쳤으나 그는 일체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생이 물었습니다. “형님께선 생선을 그리 좋아하시면서 왜 받지 않으십니까?” 공손의가 말했습니다. “나는 생선을 좋아해서 받지 않네. 만약 생선을 받으면 나는 필히 그들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 걸세. 그리되면 법을 어기게 되고, 법을 어기다 보면 재상 자리에서 쫓겨날 텐데, 내가 쫓겨나면 매일 맛있는 생선을 먹을 수 있겠는가? 생선을 안 받아야 재상에서 물러나지 않고 오래도록 생선을 먹을 수 있는 것일세.” <韓非子>

잇큐 스님(15세기, 일본)이 어린 사미승을 데리고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풍겨 왔습니다. 스님이 중얼거렸습니다. “음, 맛있는 냄새로구나.” 그리고 나서 한참을 걷는데 동자승이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스님, 아까 고기 굽는 냄새가 좋다고 하셨는데, 스님이 그래도 되는 겁니까?” 잇큐 스님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아직도 그 생선을 여기까지 들고 왔더란 말이냐?”

삼독 가운데 하나인 탐욕은 의식주를 영위하는 인간에겐 참으로 끊기 어려운 욕망입니다. 모든 동물에게 탐욕이 있으나 거의 다 본능적인 것으로써, 자신의 허기를 채우거나 번식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사실상 끝이 없어서, 보통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로부터 스스로 자유를 얻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전에 설명하였듯이, 우리가 탐욕에 사로잡히는 것은 오직 주착(住着)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물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통해서 현재와 같은 문명세계를 건설하였지만, 그 집착의 그늘에서 스스로 한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것은 생선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재상 공손의가 좋아하는 생선을 물리친 것은 싫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을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억누를 수 없는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맛있는 생선을 내쳤습니다. 생선을 좋아했지만 뇌물로 오는 것은 받지 않았습니다. 공손의는 청렴한 정치인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이성(理性)으로 탐욕을 물리친 것입니다.

잇큐 스님은 어쩌면 그와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승려이면서도 어린 제자 앞에서 생선 굽는 냄새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중이 고기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맛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물고기 굽는 냄새가 승려의 코에 맛있게 느껴진다면 코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의 마음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승려의 잘못일까요? 설마 고기 굽는 사람이나 죽은 물고기의 잘못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잇큐 스님은 그 자리를 지나서 냄새가 사라지자 ‘맛있겠다’는 느낌을 더 이상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가 풍겨와서 자신의 본성으로 그것을 비추었을 뿐, 그 사물에 대해 집착하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경계에 대해서 그의 공적한 마음거울[自性]이 본래의 작용을 나타냈을 뿐, 대상에 사로잡혀 이성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범부와는 달랐습니다.

앞사람은 이성(理性)으로 대의를 지켰고, 뒷사람은 자성(自性)으로 자유를 누렸습니다.

11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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