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런 마음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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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런 마음이 날까
  • 라도현 교도
  • 승인 2019.12.18 00:45
  • 호수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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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11

“나는 나에게 화가 납니다. 나 자신이 싫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불만스러워하는 내가 너무 한심합니다. 나는 지난 1년간 수백 시간의 봉사활동으로 이번에 한 자선단체로부터 자원봉사상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는 이러한 나를 남들이 인정해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남몰래 서운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마음공부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니 내가 너무 싫습니다.” (한 자원봉사 수행자)

열자(列子)가 벼슬을 하려고 제(齊)나라로 가다가 중도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백혼무인(伯昏無人)이 그를 보고는 왜 돌아가느냐고 묻자 열자가 대답했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뭐가 두려운가?”

“제가 지금까지 오다가 그동안 열 곳의 주막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중 다섯 군데서 저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는데도 주인이 말없이 저에게 먼저 음식을 내왔습니다.”

백혼무인이 또 물었습니다. “그게 왜 두려운 일인가?”

열자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속에 적지 않은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거동이 남들과 다르고, 또 괜스레 위엄이 있어서 저의 기에 눌려 사람들이 저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병(病)이었습니다.”

치심(癡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또는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 사이에 내가 뭔가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 받고자 하는 것인데, 갓난애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런 본능이 있지 않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가령 평소에는 너 나 없이 친구와 스스럼이 없다가, 문득 싸운 뒤에는 친구 옆을 지나치기만 해도 어쩐지 불편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전에는 나에 대한 집착이 없다가 이젠 ‘나’라는 집착이 생겨서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원래부터 있었을까요, 아니면 남과 갈등하는 가운데 생긴 것일까요?

나를 남과 구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지만, 이것은 인간이 천진한 본성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며, 내가 나를 속박하고 어느덧 괴로움 속에 사는 원인이 됩니다.

이 글 첫머리에서 자원봉사자의 마음속에 그 같은 생각이 일어난 것은, 이 분이 사악하거나 교활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애(自己愛) 때문에 본성의 지혜가 가리워서 치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한 집착을 놓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써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자성(自性)에 계합(契合)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두 번째 열자(列子)의 이야기는 옛 성인의 깊고도 철저한 수행심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 없는’ 공부는 진정코 착 없는[無着] 수행이라야 가능한데, 이 또한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며, 본디 아무것도 붙을 수가 없는 자성으로부터 이 마음을 나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행은 착 없는 수행[無着行]인 동시에 또한 함이 없는 수행[無爲行]이며, 상 없는 수행[無相行]입니다.

이처럼 치심(癡心)은 사람이 의지로써 끊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를 놓아버려서 아무런 집착이 없을 때, 비로소 자성의 혜가 드러나서 스스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나는 공부는 무념·무상, 무주·무착의 무시선법이 유일합니다.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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