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처불상’ 왜 내 눈엔 부처로 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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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처불상’ 왜 내 눈엔 부처로 보이지 않을까요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01.08 14:10
  • 호수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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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12

‘곳곳이 부처님’

처처불상은 교리 4대표어의 맨 첫머리에 있는 원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중요한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공부1) 태조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에게 농(弄)을 걸었습니다. “오늘 보니 대사는 짐의 눈에 살찐 돼지 같소이다.” “소승의 눈에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하는데 왜 대사는 나에게 부처라 하시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

대종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교의품 4장)

이렇듯 우주만유가 다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 세상에 몸을 나툰 것)이니, 일체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을 참다운 부처님으로 대한다면, 우주만유와 내가 둘 아닌 몸, 상생(相生)의 관계로 되살아나서, 만나는 인연마다 행동 하나하나 끝없는 복으로 화하여 이 세상은 한없는 불토낙지(佛土樂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도 마음으로는 모든 대상을 부처님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지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2) 위 질문은 많은 이들의 공통된 의문입니다.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는 가르침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대하면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곧 마음에 상(相)을 가진 채로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로 보겠다는 것은 이른바 ‘부처’라고 하는 개념[相]을 미리 설정해놓고, 사물을 그 개념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이성(理性)과 내 눈앞에 보이는 경계가 사사건건 반드시 충돌합니다.

가령,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앞으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아야지!”라고 맘을 먹었다 해도, 당장 악취 풍기는 시궁창을 보면 그 결심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름답다’는 개념과 시궁창이라는 경계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조성되어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상(相)을 버리지 않고는, 단지 결심만으로는 눈에 보이는 경계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심정적인 노력만 가지고는 내 안에 이미 자리잡은 무의식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결국 이성을 넘어선 제 마음의 근원, 즉 자성(自性)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중생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마음에 중생이 있으므로 밖으로 또한 부처가 있습니다. 만약 마음 가운데 ‘중생’이라는 상(相)이 없다면 밖으로 부처 또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온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일체를 부처로 볼 수 있겠습니까? ‘부처’라는 생각을 버리고 일체 상 없는 마음이 되어야 바로 눈앞에서 부처를 볼 것입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1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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