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출장소는 회원이 점점 늘어나, 원기15년 9월 예회부터는 출석회원이 20명이 넘었다. 예회를 보는 창신동 출장소 법당이 비좁아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이때는 이공주가 대종사께 출가의 뜻을 밝혔으나, 경성에 반듯한 집이라도 마련해놓고 유지대책을 세워 놓은 뒤에 출가하라며 이공주의 출가를 잠시 미룬 상황이었다.
원기17년 초, 낙산너머 돈암동 600여 평 부지를 대종사께 보여드리니 ‘수도원 기지로 하늘이 주신 곳이다’며 기뻐한다. 이에 이공주는 계동 자신의 집을 처분하여 이 땅을 매입하게 되니 드디어 경성출장소 신축을 위한 부지가 마련된다.
이공주는 20세에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 일본 유학 중인 남편이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 갑자기 열반하게 되는데, 이때 이공주 나이는 28세였다. 남편을 여의고 계동 집에서 두 아들과 친정어머니 민자연화와 살고 있던 중 대종사를 만나게 된다.
대종사 상경하면 이공주는 자신의 집 사랑채에 대종사를 모시고, 왕복 여비 등 제반비용을 부담했을 뿐 아니라 경성출장소의 유지와 관리를 담당했다. 원기15년부터는 재가교무로 재직했다.
원기17년 8월 3일 송도성으로부터 꼬마박사라 칭찬을 받을 정도로 총명했던 이공주의 둘째 아들 박원기가 13살의 어린 나이에 열반한다. 설상가상 보름 후 이공주가 믿고 의지했던 친정어머니인 민자연화 마저 열반하게 된다. 민자연화는 대종사께 올리는 물건은 상점에서 제일 좋은 물건으로 골랐고, 가격도 깎는 일이 없었다.
대종사는 “민자연화의 신심은 진리가 인증할 것이다. 그는 남자보다 더 굳센 기상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민자연화는 대종사가 상경하면 가까이 모시고 식사 수발을 했는데, 이때 대종사가 남긴 밥을 즐겨먹는 민자연화에게 대종사께서 내려준 법문은 <대종경> 변의품 16장에 나온다.
이공주의 큰아들 박창기는 경기고 졸업 전인 원기17년 2월에 익산 본관에 내려가 대종사를 시봉하고 있었다. 보름 사이로 둘째아들과 친정어머니를 여읜 이공주는 8월 31일 밤 열차를 타고 익산 총부로 향하는데, 이것이 이공주의 출가가 된다.
이후 이공주는 출가 당시의 심경을 ‘출가곡’으로 발표한다. ‘기쁘고도 기쁘구나 상쾌하구나/ 저 세상의 모든 고통 떼어 버리고/ 전무출신 수도하러 출가한 것이/ 오직 가장 다행이고 즐거웁도다.’
경성출장소 교무로 있던 이공주가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 터를 매입하고 출가하게 되니, 이동진화가 대리교무가 되어 예회를 주관해 경성회원들의 공부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종사는 자주 상경하여 경성출장소 예회에 함께하며 회원들 공부에 힘을 보탠다.
<월보> 제39호에 원기17년 9월경 경성출장소 예회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소개해 본다.
‘금일은 예회 겸 단회 일이었다. 오전 11시 이동진화의 죽비 하에 개회하고 김영신이 출석을 부르니 16명이었다. 일동 심고와 법어봉독이 있은 후, 종사주의 금언옥설(金言玉說)의 법문이 계시니, 일반 대중은 칠년대한(七年大旱)에 단비를 만난 듯이 환희가 그치지 않더라.’
대리교무였던 이동진화 마저 원기17년 11월 가산 일체를 정리하여 출가를 위해 익산 총부로 내려간다. 이동진화는 창신동 경성출장소를 희사했을 뿐 아니라, 남자인재양성단 수시양성금으로 2000원을 희사하여 젊은 회원들의 교육비로 사용하게 했다. 또한 출가 전 가산을 정리한 4000원(현 13억 정도)을 상조부에 맡겨놓고 어려운 총부살림에 쓰게 한다.
이동진화는 제1대 제1회 결산총회에서 사업1등 유공인 5인에 포함될 정도였다. 경성출장소의 두 기둥 이공주, 이동진화의 출가로 경성출장소는 어떻게 될까?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