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 고문기 원정사 천도재] 고사_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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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 고문기 원정사 천도재] 고사_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께
  • 고영학 교도
  • 승인 2020.03.30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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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고영학 대치교당 교도
감산 원정사가 열반 후, 빈소에 영정사진을 모시고 첫 인사를 하는 큰아들 고영학 교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께

 아버지를 보내드린 날 저녁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었습니다. 보름달은 풍요롭고 넉넉함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날처럼 마음 저리게 한 적도 없었습니다. 

 어느덧 아버지 가신 지 49일, 봄 날씨가 완연합니다. 그동안 직장 출근 등으로 아버지 재에 참석하지 못했던 사위 민 교수, 큰손녀 민지, 장손 태원이, 손녀 지원이, 그리고 외손자 준홍이 모두 오늘 연차를 내고 종재에 참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작은손녀 나현이는 레지던트 일하느라 시간을 낼 수 없어 오늘도 못 왔고, 외손녀 세희는 며칠 전 둘째딸을 출산하여 오늘 참석 못했습니다. 세희 출산을 축하해 주십시오.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그동안 장례 관련하여 제게 해주신 말씀을 받들어 저희들 나름대로는 정성을 들였습니다만 아버지께서 어떻게 느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버지를 영모묘원 법훈묘역에 모셨습니다. 법훈묘역으로 가실 줄은 알고 계셨을 테지만, 이번에 아버지 자리 정하면서 아버지 바로 옆자리에 어머니 자리까지 마련했습니다. 두 분이 서로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셨기에 아버지 어머니 자리를 함께 마련할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무언가 도리를 한 거 같습니다.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가신 날 영모묘원까지 동행했던 사촌 영률형이 아버지 어머니 자리 바로 윗줄에 셋째아버지 셋째어머니 자리로 정했답니다. 두 분 형제간에 항상 다정하시고 우애하셨기에 법훈묘역에서도 같이 자리를 잡게 된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정말 아쉬운 게 있습니다. 저도 나중에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은데, 저도 엄마 곁에 눕고 싶은데 법훈이어야만 한다니 법훈 자격이 없는 저로서는 그저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아버지 눈 감으시려할 때 아버지 부둥켜안고 있으면서 너무나 복받치는데 소리 내어 울지 말라 해서 꾹꾹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는 원불교에서 아버지와 저는 급(級)이 다르니 아버지 옆에 묻히지 못한다고 하니 내심 야속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옛날 저와 영모묘원에 갔을 때 “동수야, 나는 법훈묘역으로 갈지도 모른다.”라고 하셨을 때 “그 쪽으로 가지 말고 저희들과 일반묘역에 같이 있으세요.”라고 떼라도 한 번 써볼걸 그랬나 봅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손수 처리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게 습관이 돼서 가끔은 spoiled 되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저한테 정말 힘든 일을 시키셨답니다. ‘사망신고’입니다. 

 사실 오래전 아버지 폐암수술 하셨을 때도 그랬고, 최근에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이런 저런 시술할 때마다 제가 보호자동의서에 서명했었는데 그 때마다 정말이지 안하고 싶었습니다. 보호자동의서 받는다는 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사전에 통지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속으로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그런데 이번에 아버지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고, 사망신고를 하면 아버지께서 제 곁을 영영 떠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고날짜를 계속 차일피일 미뤘던 것입니다. 대표상주가 꼭 가야 한다 해서 어쩔 수 없이 갔을 뿐이지 누군가에게 대신 시키고 싶었습니다. 결국 누구에게 부탁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제가 하긴 했지만 그나마 힘든 시간을 반으로 나누려고 큰며느리 경주와 같이 갔었습니다.

  그동안 재를 지낼 때마다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셋째아버지께서 아버지 영전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거 보셨지요? 아버지가 셋째아버지보다 3살이나 적은 동생이잖아요. 그런데 그 형님은 저렇게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데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해서 형님보다 먼저 가신 건지요? 아니면 저희들 삼남매가 아버지께 효도가 부족해서 기분이 언짢으셔서 빨리 가셨는지요? 

 우리 선조들이 부모를 여윈 상주를 불효자 누구, 또는 죄인 누구라고 하는 말이 그동안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왜 불효자로 칭하고 왜 죄인이라 칭하는지… 그런데 아버지를 이처럼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우리 선조들이 불효자라고 또는 죄인이라고 자책했던 심정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정말 죄인인 거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올바로 가르쳐주셨는데 그에 보답을 하지 못해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로 곁에서 가르침을 받아온 큰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를 회고해보겠습니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께서는 선조의 가르침인 충과 효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제봉 고경명선생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갖고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이조 500년 동안 한 집안에서 제봉, 월봉, 학봉 三父子가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祠堂에서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불천위(不遷位)를 받은 유일한 가문임을 일러주시며 자연스럽게 저희들에게도 충, 효 사상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장기간 해외출장 가시면서 머무는 곳마다 저에게 그림엽서를 보내셨습니다. 그 때는 제 이름이 순이었는데 “순아, 일본에 와보니 우리나라에 비해 정말 잘사는 나라이구나.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나라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 되거라.” 라고 적으신 내용이 기억납니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나중에 커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효심은 너무 잘 알려져서 생략하겠습니다만, 아버지의 부모님에 대한 효심은 원불교의 부모은으로 승화되었으며, 할아버지 할머니의 ‘형제간에 우애하라’는 가르치심은 친척 간에는 물론이고 대인 관계에 있어서 사회성으로 확대되고 원불교의 동포은으로 승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기업가 이전에, 중용의 도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신 ‘선비’이셨습니다. 유학자이신 할아버지께서 항상 강조하셨다는 중용의 도는 한국과 같이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이분법적 사고가 주도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그렇다고 단순히 중간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균형을 잡아주신 분 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실천하신 중용은 경제 분야에서도 나타납니다. 1980년대 강남의 부동산 광풍이 몰아쳐서 누구나 아파트를 청약하려고 난리일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는 집이 있으니, 집 없는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며 서울 시민이면 누구에게나 자격이 있던 아파트 청약 한 번 해 본적이 없으셨습니다. 선비의 기본 덕목인 ‘예의’를 중시하여 행동을 절제하셨고, 매사에 ‘염치’를 갖고 마음을 단속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일정실업이 자동차부품업에 새롭게 진출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을 때도 당시 젊은 나이였던 제가 아버지께 자꾸 판을 크게 벌리기를 독려하자, 제게 과유불급을 가르치시며 균형을 잡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일정실업을 퇴직한 직원이 ‘회장님께서 조금만 욕심을 내셨다면 지금쯤 회사가 굉장히 켰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중용의 도에 기반 한 경영을 하셨기에 IMF외환위기도 넘겼고, 2008년 금융위기도 무난히 넘겼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선비 기업가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남달리 강한 분이셨습니다. 큰아들 저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서 장차 이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것인지에 대한 걱정으로 변비가 생기셨다는 일화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얼마나 투철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책임감은 아버지가 일구신 기업에서나 원불교 일에서나 자연스럽게 발현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아버지는 ‘우리 모두 한가족’이라는 모토와 ‘자리이타’ 신념에 따라 회사 직원들을 정말 한 가족처럼 대했던 따뜻한 기업가이셨습니다. 1980년대 노조 설립 바람이 불었을 때 일정실업이 소재한 안산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반월공단 내 모든 기업에서 붉은 노조 깃발이 휘날릴 때 일정실업만 조용했었습니다. 여기저기 노조 종사자들이 일정실업도 노조를 설립하라고 부추겼음에도 일정실업 직원들은 “우리 회사 사장님이 노조위원장인데 노조가 왜 필요하냐?” 며 거절했다는 일화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역사에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최근에서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면 아버지는 몇 시대를 앞서서 ‘기업의 본질’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모두를 달성하신 분이셨습니다. 

  끝으로, 아버지께서는 가시는 날까지 어리석은 자들에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와 화해의 장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랜 동안 서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반목하고 지내왔던 사람들이 아버지께 조문을 오면서 우연히 만나게 하여 그동안 아무도 풀 수 없었던 서로간의 갈등을 녹이고 본래의 자리를 찾도록 하는 등 아버지께서는 장례식장을 화해의 장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 분들이 놀라면서 만나고 후회하고 서로 화해하는 그 장면 장면을 다 보셨으니 얼마나 흐뭇하셨을까요.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맺어주셨으니 정말이지 최고의 덕목을 베풀고 가셨습니다. 

  아버지께 고하고 싶은 얘기는 한없이 많지만 이제는 제가 앞으로 대처해 나갈 일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매 재 때마다 아버지 영정사진 보며 고해왔지만, 무엇보다 엄마 편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하노라.” 평소에도 이 시구(詩句)를 반추해왔으며, 제 아이들 민지, 나현이, 태원이에게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항상 감사해하고 효도하라며 일러주던 구절인데, 막상 아버지 가시고 나니 너무나 많이 부족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중에 일말의 후회조차 들지 않도록 엄마를 정성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착한 큰며느리 경주와 계속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항상 강조하시던 형제들 간의 우애와 화목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들 수현이나 동현이 모두 저보다 아버지 뜻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효자 효녀이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일정실업은 다시 창업한다는 심정으로 임하겠습니다. 기업경영이 그동안 제가 일해 왔던 분야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리는 데는 그동안 제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어려운 회사에 대해 모르쇠 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일정실업의 성과가 아버지께서 공들이신 감산장학재단의 활동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일정실업, 현대내장 임직원들 모두 아버지를 존경하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회사 사무실에 아버지 사진 걸어 놓고 인사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 잘 생기셨습니다. 그런데 인품은 쉽게 말로 표현이 안 되는군요. 해서 그냥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셨고, 매사에 중용의 도를 실천하신 선비이셨고, 회사 직원을 가족처럼 아꼈던 기업가이셨고, 자상한 남편이고 하늘같은 아버지셨고 인자한 할아버지셨다고 기억하겠습니다.

  끝으로, 비록 이 자리가 많은 대중이 모인 자리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철없는 아들이 아버지한테 마지막으로 어리광 한 번 피우고 마치겠습니다. “아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 아시지요? 한번 아빠는 영원한 아빠입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2020년 3월 25일
종재를 맞아서 큰아들 동수가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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