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열린날_영상설교] 원불교 열린 날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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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열린날_영상설교] 원불교 열린 날의 역설
  • 한덕천 발행인
  • 승인 2020.04.0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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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한덕천 서울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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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철저히 망상에 사로잡힌 중생심을 부숴버리고 내가 부처라는 것을 확연히 아는 것 즉 일체유심조임을 깨친 것을 말합니다"

원불교열린날에 우리 모두의 화두는 깨달음입니다.

깨닫기 위한 대종사님의 구도과정은 중생의 삶에 머물지 않고,

깨어나고자 하는 치열한 과정이었습니다. 대각개교의 원불교열린날은

교단과 우리가 깨어있음이요, 교단과 우리가 거듭남이요,

교단과 우리가 새로워짐으로, 인류와 교단과 우리가 구원받는 길입니다.

원불교열린날 4월은 대종사께서 20여 년 동안 구도하셨던

그 삶을 묵상하는 하루하루가 되어 잉태의 역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종사님의 치열한 구도 과정 없이 원불교열린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렸던 4월입니다. 4월이 되면 기독교인은 [부활절]을 생각하고, 원불교인들은 [원불교열린날]을 생각할 것입니다.

한편 4월이 되면 언론에 종종 인용되는 시가 있으니, 토머스 엘리엇의 ‘황무지’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이 자라고 추억과 정염이 뒤섞여 잠든 뿌리가 봄비로 깨어난다.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거니”로 시작하는 詩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 시의 내용보다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어휘만 회자되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을 접하고 왜? 가장 잔인한 달일까 하고 오랫동안 의문이었습니다.

‘황무지’는 원래 봄의 몰(沒)염치성을 노래한 시라고 합니다. 봄철에 움과 싹이 새로 돋는 건 사실 봄의 공로가 아니라, 혹독한 추위 속에 씨앗과 뿌리를 건사해 온 겨울의 기나긴 산고(産苦)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겨울의 공은 잊은 채 봄만 찬양합니다. 우리가 잊어서 안 되는 건 바로 이 같은 역설(逆說)입니다. 화려한 축제 뒤에 가려져 있는 잔인한 잉태의 역설, 봄이 간직한 그 비밀입니다.

‘황무지’는 기술 문명에 갇힌 인간성과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 대한 허탈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함조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4월을 시작하면서 황무지의 시를 떠올리는 것은 원불교열린날과 기독교의 부활절이 바로 이 잉태의 역설을 자각해야 참다운 부활과 원불교열린날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부활절과 원불교열린날은 인류에게 큰 복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계시의 종교와 깨달음의 종교가 서로 공존하면서 인류구원의 길잡이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과제 중의 하나는 어떻게 이웃 종교들과 서로 진리가 하나라는 관점에서 만날까 하는 것입니다. 탈종교시대에 진리는 하나라는 원불교의 가르침은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원불교의 정체성은 이 하나의 진리를 이웃 종교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 때문에 기독교의 부활절과 원불교의 대각개교절 잉태 역설을 생각하며, 4월의 화두로 삼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보다 역사가 깊고, 기독교의 세계화를 이룩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크고 핵심 전례인 부활절을 먼저 주목하고자 합니다. 4월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부활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딛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꼭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탐욕을 죽이고 오만을 죽이며 비인격성을 죽이고, 에고를 죽여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 새로운 삶 즉 다시 태어나는 은혜가 있다는 의미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외면하고 부활만 바라보는 것은 맹신이며 무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풍경1 : 죽음을 예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 하였지만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했고, 제자의 밀고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깨어있어라’라는 말씀을 이해 못 하는 제자들에게 그분은 자신의 생명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절의 역설은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중생들을 위해서 바치신 것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은 인간의 에고를 죽이고 깨어있어라, [다시 태어나라]의 상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원불교열린날의 역설은 무엇일까?

원불교는 대종사님의 대각으로 시작되었는데, 불교적으로 깨달음은 철저히 망상에 사로잡힌 중생심을 부숴버리고 내가 부처라는 것을 확연히 아는 것 즉 일체유심조임을 깨친 것을 말합니다.

이를 부연 설명하자면 에고로 가득 찬 중생심을 부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경산종법사께서 자주 쓰시는 중생의 문패를 부처의 문패로 바꾸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대각의 소식을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으로 표현해주셨는데, 이를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 하나와 만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현은 다르고 깨달음의 영역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에고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을 다 타파하면 공통으로 만나는 진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결국, 저는 부활이나 깨달음이나 그 본질적 의미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바탕을 둔 부활을 이해할 것이고, 불자들은 깨달음을 통한 부활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깨달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믿음과 깨달음은 에고의 욕망을 끊임없이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사회적 행위일 뿐”이라는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다만“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면 지혜를 등한시하게 되고, 지혜만을 중요시하다 보면 믿음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종사님께서 신앙과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는 가르침 주셨는데, 바로 부활절과 대각개교절은 서로 만나서 균형 잡힌 조화를 상징하는 미래지향적으로 인류에게 중요한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풍경2 : 잠깐 화제를 바꾸어 기독교 영성가로 유명한 [다석 유영모]선생의 ‘머무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정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 머무를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일 뿐이다. 우주 공간이 우리의 주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사람은 모두 머무를 곳을 찾는다. 그러나 머물면 썩는다. 무주(無住)라야 산다. 산다는 것은 머물지 않고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즉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풍경3 : 대종사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머물기를 거부했습니다. 남들처럼 현실에 머물지 않고 우주에 대한 의심과 삶에 대한 의문으로 20년의 긴 세월을 기도하고 스승을 찾고, 일상적이고, 보통 사람들의 삶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내 이일을 장차 어찌할꼬!” 한 생각으로 구도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대각을 통해 개벽을 말씀하셨습니다. 개벽이란 천개지벽의 준말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날로 물질문명은 개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개벽 되는 물질에만 인간이 머물다 보니 물질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란고해가 장차 한이 없을 것이니 정신을 개벽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정신개벽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며, 또한 “물질에만 머물지 말고 깨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물질문명 없이 우리는 생명을 보존할 수 없고, 삶을 꾸려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장기간 침체에 빠질 우려가 있어서 모든 국가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인간의 필요 때문에 물질문명은 상상할 수 없이 발달시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해지고 그 융성해지는 물질의 힘은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수많은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극심한 불평 등으로 정신을 쇠약하게 하여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 물질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면 파란고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으며, 그 파란고해를 벗어나기 위해 깨어나라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라”라고 주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로 ‘깨어있음’을 보여주셨고, 다석 유영모선생은 ‘무주(無住)’ 즉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붓다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머무는 곳에 집착이 있고, 집착하는 곳에서 우리는 늘 머물기 때문입니다. ‘나’에 머물면 ‘나의 마음’이 나오고, ‘나’에 머물지 않으면 ‘부처의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물질에 머물지 말고 정신을 개벽하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에 머물지 말아야 파란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어라”라는 예수의 메시지도, “머물지 말라”는 붓다의 메시지도, ‘물질에 머물러 지배를 받지 말고 정신개벽을 하라!’는 대종사님의 말씀도, 우리에겐 머물지 말고, “깨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곳에 부활의 ‘길’이 열리고, ‘파란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신개벽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4월은 원불교인들에게 대종사님께서 대각하셔서 교문을 열어주셨고, 모든 교도의 공동생일날로 정해주신 가장 큰 축제의 달입니다. 이 축복의 4월을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경축하지 못하고 있는데, 금년에는 모든 교도님이 원불교열린날이 잉태하기까지 그 치열한 구도과정이 의미하는 대각의 역설을 깨닫고, 대종사님 십상이 의미하고 있는 이면의 역설을 신앙과 수행하는 것으로 자신성업봉찬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종사님의 대각은 대종사님께서 후천개벽의 주세불로 부활하신 날이며, 우리에게 그 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참다운 대각개교 봉축은 ‘대종사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대종사님의 깨달음이 나의 깨달음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깨달음은 일원의 진리로 깨어있음이며, 일원의 진리로 거듭남입니다. 부활절은 죽음을 통해 새로 태어남을 상징하듯이 부활의 역설을 알아야 합니다. 원불교열린날은 깨닫기까지 대종사님의 구도 의미를 알아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대각개교라는 잉태의 역설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원불교열린날에 우리 모두의 화두는 깨달음입니다. 깨닫기 위한 대종사님의 구도과정은 중생의 삶에 머물지 않고, 깨어나고자 하는 치열한 과정이었습니다. 대각개교의 원불교열린날은 그래서 교단과 우리가 깨어있음이요, 교단과 우리가 거듭남이요, 교단과 우리가 새로워짐으로, 인류와 교단과 우리가 구원받는 길입니다.

부활과 대각은 그냥 자연스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중생들의 생각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혹독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중시합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부활을 묵상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더욱 깊고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잉태의 역설을 통해 참 부활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보여준 역설의 가르침을 깨달을 때 부활의 꽃이 필 것입니다.

우리 원불교인에게 원불교열린날 4월은 대종사님께서 20여 년 동안 구도하셨던 그 삶을 묵상하는 하루하루가 되어 잉태의 역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종사님의 치열한 구도 과정 없이 원불교열린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①왜, 집군성이대성의 구세주로 이 사바에 오셨는지? ②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구도하셨는지?, ③왜 생활을 떠나지 않고 구도하셨는지? ④왜 이 회상이 완전무결한 새 회상이라고 선포하셨고, ⑤왜 세계의 주교가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는지 화두를 들고 깨달아가는 4월의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대종사님의 대각이전 치열한 구도의 삶은 대각개교라는 잉태의 역설이기에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불교열린날의 결과만 찬양해서는 참다운 대종사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잉태의 역설을 깨달아야 중생에 머물지 않고 「다시 태어남」, 「거듭남」, 「깨어 살아라」라는 정신개벽의 공덕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거듭나게 하고, 나를 새롭게 하여 [나의 원불교열린날]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종사님의 구도 과정이 나의 자신성업봉찬의 과정이 될 때 105년의 원불교열린날은 더욱 축복 된 날이 될 것입니다.

원불교열릴날의 역설은 대종사님의 탄생과 구도 과정에 있습니다.

 

 

거룩하옵신 법신불사은이시여!

4월의 첫 법회를 경건함으로 간절함으로 봉행하옵나이다.

특히 4월은 원불교가 열린 대각개교의 대성업이 이루어졌기에 모두 감사와 기쁨으로 찬송과 경배로 찬양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비오며 아직도 소멸되지 않는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인류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쉬움과 아쉬움을 더하여 법회를 봉행하옵나이다.

법신불사은이시여!

봄철에 움과 싹이 새로 돋는 건 사실 봄의 공로가 아니라, 혹독한 추위 속에 씨앗과 뿌리를 건사해 온 겨울의 기나긴 산고(産苦)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대종사님의 대각개교도 긴 고행의 산고였나이다. 예수님의 순교와 부활이 인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복음이 되었듯이, 대종사님 구도의 역설이 대각개교를 통해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에게 큰 복음이 되었음을 감사하고 경배하나이다.

저희들은 이 4월을 대각개교의 역사가 만들어지기까지 대종사님의 숙겁의 서원에 눈뜨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행난행하셨던 뜻을 깨닫고, 대종사님의 깨달음과 개교표어가 함축하고 있는 잉태의 역설 하나하나에서 대종사님을 만날 수 있는 4월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래서 4월의 하루하루가 대종사님과 하나되어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셨던 그 대자대비에 목욕하고자 하나이다.

그래서 물질과 중생의 삶에 머물지 않고, 부처로 다시 태어나고, 거듭나고, 깨어 살아가는 활불이 되고자 하오니 호렴하시어 저희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걷도록” 하옵소서.

그래서 “저희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걷게” 하옵소서.

일심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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