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달장자 황정신행의 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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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장자 황정신행의 귀의
  • 박혜현 교도
  • 승인 2020.05.05 11:24
  • 호수 11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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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10

 

신축한 지 2년 정도 지나자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은 장마에 비가 새고 온돌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수리비용이 많이 들어가 보수공사를 미루고 있었다.

원기21년 10월 박창기(구타원 이공주 장남)는 개인 돈 300원을 들여 한 달 정도 직접 감독하며 개보수공사를 마무리했다. 경성지부 회원들은 50원을 모아 회관으로 오는 길에 다리를 놓고 비탈길을 닦아서, 회관뿐 아니라 도로 정비까지 마치게 된다. 같은 해 10월 15일에 우리 교단 대호법 위의 문을 연 황온순이 돈암동 회관을 찾아와 입교하며 불법연구회와 귀한 인연을 맺게 된다. 황온순은 원기20년 여름, 다섯 살 된 아들 강필국과 금강산을 여행하다 개성에 사는 불법연구회 회원인 이천륜을 만난다. 여행 중에 만난 두 사람은 가정생활과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이천륜은 “세상일은 전생의 인연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며 경성에 있는 불법연구회에 가서 정신수양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당부한다.

낙산 근처 이화동에 살고있던 32세의 황온순과 우리 교단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기독교를 신앙하던 황온순은 후일 원불교 재가교도 중 여성 최초로 수위단원에 피선되고 ‘팔타원 황정신행’으로 거듭나게 된다.

황온순은 입교한 지 6개월이 지난 원기22년 4월에 대종사와 처음 만나게 된다. 도(道)를 듣고 싶어 왔다는 황온순에게 대종사는 시계를 인용하여 생사(生死)에 관한 법문을 해준다. 부처 되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이완철 선생(당시 경성지부 돈암동회관 교무)에게 공부를 배우라는 당부와 함께 정신행(淨信行)이라는 법명을 내려준다. 법명을 받은 황정신행은 3일간 대종사를 찾아가 자신이 가진 의문에 대해 문답한다.

이때 황정신행은 대종사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 ‘시골 선생님’이라 불렀다고 훗날 회고했다.

이 당시 황정신행은 이화동 이화장(현재 우남 이승만 기념관)에 살고 있었다. 원기16년(1931년) 이화동 야산 3000평을 사서, 양주(현 한국보육원)에서 나무와 돌을 옮겨와 황정신행이 손수 감독하여 집을 짓고 이화장이라 이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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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신행은 대종사를 이화장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도 했으나, 8.15광복 후인 1947년에 이화장은 이승만에게 넘어가게 된다. 대종사를 만난 이후, 황정신행은 경성지부 예회에 참석하며 새벽 4시에 일어나 낙산을 넘어와 하루에 한 시간씩 이완철 교무에게 <금강경>을 배운다. 황정신행은 <금강경> 공부와 함께 대종사를 여러 번 만나며 인과보응과 불생불멸의 진리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다. 황정신행은 대종사가 새 부처라는 확신으로 교단을 향한 신심과 공심을 깊이 뿌리내린다. 그리고 경성지부의 곤궁한 살림을 보고서 자신의 집 살림도구와 곡물을 가져와 경성지부 살림을 책임지다시피 한다. 황정신행은 익산 총부에 내려가 훈련을 받고 대종사 법문을 받들며, 일제 치하의 어려운 총부 사정을 알고서 초기 교단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인력거를 타고 익산 총부로 들어오는 황정신행을 보고 대종사가 “기계는 괜찮지만, 인력거는 사람이 끄는 것이라 다음에 땀날 때가 있을 것이오” 하니 “남들도 모두 타는데요”라고 했다. 대종사는 “차차 내 말이 이해될 때가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 대종사는 황정신행에게 ‘일상삼매(一相三昧)·일행삼매(一行三昧)·동정일여(動靜一如)·영육쌍전(靈肉雙全)’이란 친필법문을 내리고, 총부에 내려오면 성리 법문을 많이 설해줘 깊이 있는 공부와 큰 사업을 병행하게 배려했다.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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