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①] 6남매 삶의 귀감이셨던 아버지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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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①] 6남매 삶의 귀감이셨던 아버지 영전에
  • 전정오 교도
  • 승인 2020.05.1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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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교당 교도회장

아버지! 아버지! 이젠 아무리 불러 보아도 자애롭게 웃으시며 “왔냐?” 하시던 아버지를 뵈올 수가 없게 되었네요. 작년 6월 1일 총부 기념관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종사님 추모담을 하실 때만 해도, 앞으로 몇 년은 더 추모담을 하실 수 있으리라 당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처럼 홀연히 열반에 드시다니 지금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저희 6남매에게는 삶의 귀감이셨고, 존경과 경이 그 자체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아버지와 이순신 장군을 말하곤 했었는데, 그러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게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대천해수욕장에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어린 저에게 해수욕장의 파도는 집채만 하게 느껴져 너무 무서웠음에도 아버지가 옆에 계시니 괜찮겠지 하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그렇게 평생을 저의 지킴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참외를 사서 다정하게 깎아 주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가에 생생합니다. 밖으로는 과묵하고 근엄하셨지만, 늘 아버지 옆에서 자려고 했던 어린 저에게 아버지는 한 없이 속 깊고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저의 어린 시절에도, 우리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해 주실 분이란 믿음을 주셨습니다. 버스가 귀하던 시절, 만원 버스로 고생하지 말라고, 총부 집에서 이리국민학교까지 자전거로 통학하라며 예쁜 자전거를 사서 타는 법을 가르쳐 주시던 아버지!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을 포함 저희 6남매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 양복 한 벌로 사시던 시절임에도, 제가 중학생인 그 시절에는 매우 귀했던 영어 회화 레코드와 브리태니커 영어 백과사전 등을 사 주시면서 영어공부와 글로벌 마인드를 일찍부터 길러 주셨던 아버지셨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재주가 많으셨지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까지는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학, 사회, 역사, 경제, 지리 등 그 어떤 것을 여쭤보더라도 백과사전처럼 조금도 망설임 없이 즉시 답변해 주시던 아버지!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방학숙제를 위해 나무를 깎아 만들어주신 물레방아가, 이리국민학교에 전시되어 전교생이 볼 수 있도록 할 만큼 아버지는 손재주도 많으셨습니다.

일본어도 참 잘 하셔서 교단 행사 때 일본어 통역은 아버지가 하시고 영어 통역은 아타원 고모님이 하셨을 때, 두 자식을 바라보는 동타원 할머니는 참으로 흐뭇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이전부터 수시로 좌산 상사님의 책을 비롯, 경산 상사님의 책까지 일본어 번역을 도맡아 오곤 하셨지요. 

95세가 되던 재작년까지 좌산상사님의 책을 번역하셔서, 그 연세에 번역 일을 부탁하신 분이나 그것을 기꺼이 하시겠다고 나서는 분이나 두 분 다 대단하시다고 우리 모두 놀랐음에도, 아버지는 마치 고3 수험생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번역에 몰두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저희들이 너무 과로하신다고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려도 알아서 쉬니 괜찮다고 하시며, 수백 쪽에 해당하는 두툼한 책 번역을 마치시는 모습에서 아버지 역량의 끝은 어디일까,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에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추모담 강연과 번역 등 아버지의 역량을 쉬지 않고 나투시며, 교단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려 노력하셨음이 지금까지 건강하실 수 있었던 비결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씀도 잘하셔서 정산종사님 열반하셨을 때, 지프차에 타고 가면서 장례행렬을 중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오랫동안 저의 자랑으로 새겨졌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수업시간 중에 대성이 아버지는 이리시에서 최고의 웅변가라고 말씀하셔서 저를 매우 우쭐하게 해 주셨던 아버지! 아버지 원광여중고 부교장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제자들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 아버지의 훈화말씀을 새기고 실행하고 계신다며, 한 번도 비슷한 훈화를 하신 적이 없으셨다 말씀하곤 하시니 아버지의 그 역량과 지혜의 크기를 감히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명절 때면 자손들에게 꼭 법설을 하셨는데,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말씀이 너무 좋아 어느 해인가는 글로 적어 주시기를 청하였더니,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적어 보내주셔서, 저와 집 사람이 까무러치게 놀랄 만큼 재주가 많으셨던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저희 형제들은 아버지가 나이 들어가심이 너무나 아깝고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저희 6남매에게는 항상 큰 꿈을 갖도록 해 주셨지요. 술 한 잔 기분 좋게 하고 오신 날에는 6남매를 앉혀놓고 격정의 시대에 아버지가 못 이루신 꿈들을 저희들에게 심어주시곤 하셨습니다.

전쟁을 겪으신 시대인지라 전쟁이 나도 의사는 어느 쪽 진영이든지 필요하다며 장래 의사가 되기를 원하시곤 하셨는데, 아들 넷이 의사가 되어 아버지 열반 길을 편안히 집에서 모실 수 있었습니다. 마취과, 정신과, 한의사 등 아버지 열반 길에 꼭 필요한 의사들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할 때, 미국에 오셔서 제 손에 1,000불을 쥐어 주시던 아버지! 필요 없다고 해도 아들이 유학할 때 경제적으로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아버지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냥 받으라고 하시던 아버지! 평생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자식들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음에도, 아버지는 근검절약 정신을 한 순간도 놓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는 택시 한 번 타지 않으시고 불편한 다리로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셨던 아버지! 저희가 드린 용돈을 모아서 아버지의 병원 비용, 장례 비용까지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처럼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식들에게조차 피해 주거나 신세지는 것을 빚이라 생각하셨습니다.

40여년간 교직에 봉직 하시면서도 늘 선공후사의 정신으로 학교와 학생들을 우선하시고, 개인적인 삶은 항상 우선순위를 뒤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북일국민학교 6학년 담임시절, 자녀들의 진학을 반대하고 농사일을 시키려했던 학부형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시고,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학생 거의 모두가 도내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이 장래 큰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 주셨다는 감동스러운 예화는, 저희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도 않는 데도, 수고료 한 푼 받지 않으시고, 공익을 위해 애쓰셨던 아버지의 삶을 통해 저희들은 보고 배우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전무출신은 아니셨지만, 원광중학교, 원광여자중.고등학교, 원광보건대학교에서 근무하시던 기간 동안 보수도 전무출신과 같이 받는 등 전무출신과 같은 삶을 사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저희들에게 우리 집안은 대종사님과 원불교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비록 저희 6남매 중에서 전무출신은 없지만, 모두 각 교당에서 회장단으로 일하면서 보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평소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손녀 딸, 혜봉이가 대를 이어 전무출신 서원을 하고 영산대학에 다니니, 아버지의 아쉬움도 많이 덜어 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작년 8월에 대종사님 추모담을 하시기로 전북교구장님과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을 못 지켜서 너무 미안하다고 병상에서도 안타까워 하셨지요. 그만큼 아버지는 약속 또한 생명처럼 중시 하셨습니다.

작년 9월 발병하신 후, 열반하실 때까지 자식들이 매일 순번을 정해 아버지 간병을 할 수 있게 하여, 저희들에게 효도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지금, 비록 이별이 섭섭하기는 하지만, 저희들에게 얼마간이라도 불효의 회한이 없도록 끝까지 자식들을 배려해 주시고, 적당한 때 떠나시는 것을 보니, 아버지는 생사해탈 뿐 아니라 생사거래도 자유로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셔서 2시간씩 기도와 독경을 하셨던 아버지께서도, “죽을 때가 되어 봐야 생사해탈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식견이 좁은 저희들에게는 그것이 생사해탈로 보입니다. 부모님은 언제 보내드려도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지만, 인생의 이치가 그러하니 이제 홀연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열반 길에서 뼈를 에이는 고통이 있으셨겠지만 조금도 내색 하지 않고 참으시느라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이제 잠시 편히 쉬셨다가 성불제중 하시는 큰 서원으로, 더욱 큰 성자로 저희 회상에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희 6남매, 아버지의 유훈을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도 가족 간 우애하고 어머니께 효도하며 잘 살겠습니다. 그리고 대종사님과 원불교의 은혜를 잊지 않고 봉공에 앞서는 보은자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저희들에게 몸소 귀감이 되셔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해 주신 것, 제 평생 최고의 영광이자 행운이었습니다. 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 이 글은 소태산 대종사의 친견제자 [로산 전성완 원정사]가 원불교 회상에 입문하여 평생을 전무출신에 버금가는 정신으로 공부와 사업에 힘쓰다 지난 3월 25일 97세의 일기로 열반하자 49일 동안 자녀손과 동지들이 올린 고사와 추모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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