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 전성완 원정사 고사] 대종사 혜명의 등불로 살다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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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 전성완 원정사 고사] 대종사 혜명의 등불로 살다간 아버지
  • 전종운 교도
  • 승인 2020.05.20 19:26
  • 호수 11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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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아버지! 옛말에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에 비유해서 무슨 말인지 미처 알지 못했는데 오늘을 당하고 보니 비로소 그 뜻이 헤아려집니다. 언젠가 한 번은 보내드려야 할 길이라고 애써 위안을 해 보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허전함으로 먹먹해지는 가슴은 어찌해야 하나요? 아버지, 이제 슬픔은 가슴에 묻어두고 떠나시는 길에 두어줄 글을 받들어 아버지와 이생에서 맺은 인연의 자락을 가슴에 새겨보려 합니다.

아버지 어린 시절, 대종사님을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을 보면서 ‘아버지는 참 복도 많으시구나. 무슨 복을 지으셨길래 대종사님을 할아버지로 모시고 사셨나? 그래서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저절로 법이 몸에 배어서 이 법과 하나가 되셨나 보다’ 하며 부러워하곤 했지요.

조각 종이 한 장과 노끈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으셨다던 대종사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그대로 살다 가신 할머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아버지께서는 한평생 몸에 스민 근검절약으로 살아오셨지요. 쓰고 난 휴지 한 장 그대로 버리지 않고 말려서 재사용하셨고, 못난 자식에게 치료받으러 서울에 올라오실 때에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오셔서 금니로 하지 말고 싼 것으로 하라시며 당신 몸에 비단 한 조각 걸치기를 사양하셨지요. 모르긴 해도 대종사님을 모시고 살 때 익히신 그대로시겠지요. 그런 할머니와 아버지를 뵙고 살면서 두 분의 눈을 통해서 대종사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나를 본 눈이라도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철원에 오셨을 때 교무님께서 ‘어른님 오셨다’고 식사 대접을 해드린다고 하니, 아버지께서는 어찌 공인에게 대접을 받을 수 있냐고 하시며 대종사님 법을 전하는 교무님에 대한 예우를 가르쳐 주셨지요. 저는 그 이후로 교당 교무님뿐 아니라 치료받으러 찾아주시는 모든 교무님들께 공인으로서 예를 다해 치료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겠지만 아버지를 스승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언젠가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자식의 질문에 ‘성실’이라는 두 글자를 주셨지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일생은 성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오직 정성으로 일관하신 그 행동 하나하나는 성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일생에 후회되는 것이 있으시냐는 질문에 “나는 후회되는 것이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교도회장이 되었다는 저에게 화합하는 회장이 되라는 당부도 하셨지요. 평소에도 아버지께서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화합을 강조하시며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참는 것이 참으로 참는 것’이라며 ‘용서하고 또 용서하면서 상대를 감화시켜 나가는 것이 화합을 지켜가는 길이다’고 하셨죠. 기회가 될 때마다 저는 자식들에게 할아버지의 ‘성실’과 ‘화합’을 얘기하며 닮아가기를 당부합니다.

아버지! 언제부터인가 저는 아버지를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했어요. 나도 아버지처럼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어야지. 나도 아버지처럼 정직과 성실로 인생을 살아가야지. 나도 아버지처럼 기도·정진하는 수행인이 되어야지. 나도 아버지처럼 신심과 공심으로 똘똘 뭉친 신앙인이 되어야지. 나도 아버지처럼, 나도 아버지처럼…. 수많은 ‘나도 아버지처럼’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것은 대종사님 밝혀주신 혜명의 등불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어받으시고, 그 등불을 보며 아버지 어머니가 법등을 밝히시었고, 아버지 어머니의 그 법등을 보고, 제 마음에 조그마한 법의 등불이 밝혀진 것처럼, 나도 아버지처럼 제 자식의 마음에 법등을 밝혀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교당에서 대종사님 ‘게송’을 강연하게 되었다고 하자, 아버지는 “네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하시고, 상대적 관념을 지워버린 유무초월의 경지를 설해주시며, 자식의 어두움을 밝혀주려 애쓰셨습니다. 몇 번씩이나 강연했던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를 의기양양하게 여쭈었을 때는 ‘역’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왜 또 우(又)자를 쓰지 않으셨는지를 말씀하시며 무지한 자식을 가르쳐 주셨지요. 그 말씀을 깨치려 가슴에 품고 살아왔더니 종법사님께서 어찌 아시고 아버지 열반 법문으로 내려주셨네요.

아직도 여쭐 말씀이 너무도 많은데 아버지는 이제 말 없음으로 답을 하시는군요. 모든 것이 다 은혜이니 우리 사는 생이 다 보은이라고 하시며 자식에게조차 빚을 져서 큰일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말씀 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저희에게는 다 은혜이니 저희는 다만 아버지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의 보은을 한 것뿐입니다.

병상에 계실 때에도 ‘죽을 날 받아놓고 자리에 누워보니 생사가 마치 책장 한 장 넘기는 것 같다’며 활짝 웃으시던 아버지! ‘내가 이제 먼 길을 떠날 만큼 충분히 건강하다’시며 열반을 준비하시던 아버지! 매주 아버지를 뵈러 오가던 기차 안에서 천도품을 읽으며 생사연마를 하곤 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가실 길이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없는 본연 청정한 그 곳이구나. 그 자리는 어찌 생겼을까?’를 연마하면서요.

‘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면서까지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했지요. 아버지 열반하신 후 마지막 남은 색신을 저 뜨거운 불에 소멸시켜드리고 나온 한 줌의 재를 조그만 상자에 담겨 건네받았을 때,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열기가 두 손 가득히 전해져 이제 다시는 아버지를 뵐 수 없다는 절망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모묘원에 모셔드리고 돌아온 서울의 천변에는 무심한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그 꽃을 보며 ‘나는 이제 봄에 꽃 구경은 다했구나.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도 무심한 꽃들은 피어날 거고 그 꽃을 보면 떠나신 우리 아버지 그리워서 가슴이 메어질 테니….’

아버지 그래도 저는 좋아요. 아버지 가시는 영로에 천지님이 어찌 알고 꽃으로 장엄해 주셨을까요? 아버지는 항상 제 마음속에서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남으셨는데, 저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는 아버지처럼 정진 적공하며 보은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대신하려 하오니, 아버지 부족한 자식을 용서하소서! 이제 부디 청정일념으로 꽃길 따라 가시었다가 새 몸 받아 오실 때엔 평생 염원이셨던 ‘대원정각’ 하시고, ‘성불제중’의 불과를 이루시어 널리 세상을 구원하는 성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올리옵나이다. 아버지, 나의 스승님!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행복했습니다. 부디 편히 다녀오세요.

* 로산 전성완 원정사 종재식은 5월 12일이었다.

전종운
구리교당 교도회장
곤치과 원장

 

5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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