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⑤] '척지지 마라. 미루지 마라, 진심을 다해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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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⑤] '척지지 마라. 미루지 마라, 진심을 다해 감사하라'
  • 전종만 교도
  • 승인 2020.05.22 2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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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아들 전종만 교도 / 수원교당

이제 아버지께서 저를 처음 보셨던 그만큼의 나이가 되어

저는 아버지를 저 피안으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제 기억 속 아버지의 마지막 유훈

'척지지 마라. 미루지 마라, 진심을 다해 감사하라'는

그 말씀 새기고 새기며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생에 와서 빚만 지고 떠난다며 나는 단 한 평의 땅도

차지할 자격이 없으니 화장하여 뿌려달라고 하시던 아버지.

차마 그 말씀만큼은 따를 수 없었습니다. 더 보은하며 살라는

부촉의 말씀으로 알고 정성을 다하여 받들겠습니다.

아버지 영전에
해가 뜨고 날이 저물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거실에 앉아 "왔냐" 하시며 가족들을 맞아 주시던 그 모습도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일처럼 그저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희를 맞아 주시던 그 온화한 미소도 음성도 손길도 더 이상 이생에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영정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처럼 생경하기만 합니다.

출근길 운전을 하다가도, 진료를 마치고 혼자 남겨진 진료실에 우두커니 있다가도 문득 환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그 생경함은 가슴 한 편의 뜨거운 무엇인가가 되어 눈앞을 흐리게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하신 이 찬란한 봄날. 아버지를 저 피안의 길로 보내드려야 하는 슬픔을 안았으니 원기 105년의 봄날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인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

대종사님을 할아버지로 모시며 초기 교단의 법 높으신 선진님들의 성혼을 온몸으로 체화하시고 원불교 정신과 하나 된 삶을 사셨던 큰 스승님. 나는 원불교 때문에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내 전체를 바쳐서 봉공을 해야 한다 하셨던 대 봉공인. 왜 우리 집은 구정이 아니라 신정 때 세배를 하느냐고 여쭈니 원불교에서 구력으로 설을 지내는 것은 대종사님의 방침에서 어긋나는 것이라며 사소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에서조차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따르셨던 참 신앙인.

그런 아버지를 곁에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삶의 순역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절실히 느끼곤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식을 대하는 법이 없으셨지요. 나는 내 방에 들어오는 분들을 한 번도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해 본 적이 없다며 사람에 대한 예의와 경외심을 강조하셨고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도 늘 그러하셨습니다. 폭력을 극도로 혐오하셨기에 TV에서 권투경기 시청하는 것도 못하게 하셨고 누구를 대할 때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제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그렇듯 미소 짓고 계셨지요. 제게는 단 한 번도 매를 대거나 심한 꾸지람을 하신 적이 없었지요. 초등학교 시절. 저는 마음의 병을 앓아 여러 병원을 돌아다녀야 했지만 그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라서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하여 아버지 손을 잡고 오가던 개정병원의 고즈넉한 오솔길, 서울대 병원 앞 햇살 쏟아지던 마로니에 공원의 벤치, 어느 최면술사를 찾아가던 이름 모를 언덕길조차 제 유년 시절의 가장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어김없이 들르던 이리역 앞 가락국수 집에서 너무 맛나게 가락국수를 먹는 저를 보시고는 집에서도 해줘야겠다며 주인에게 국수 국물에 들어가는 재료가 무엇인지 물어보시고 메모지에 받아 적으시던 아버지. 강의 때문에 서울에서 한 번씩 집에 내려올 때면 밥 먹자시며 팔순을 넘기신 연세에도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시고 국까지 데워서 놓아주시던 아버지. 졸필로 여물지 않은 책을 냈을 때도 오탈자와 어색한 표현을 하나하나 찾아 수정해 주시고 다음에 출판할 때 참조하라며 격려해주시던 아버지. 원망했던 기억, 미워했던 기억 한 번쯤 남기셨다면 이렇듯 애틋하지는 않았을 것을... 따뜻한 기억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시니 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찌 다 감당해야 할까요.

아버지, 나의 아버지.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아이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아 하루하루가 상심일 때마다 이 요란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새벽이면 의두를 마주했습니다. 그 때마다 되뇌었던 대적공실 4번째 의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 그저 막연하게나마 그 경지를 동경했지만 무지하고 어리석은 제가 어찌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 떠나시는 길, 종법사님의 열반 법문 속에서 다시 만난 석립청수성. 아!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삶이 그 안에 있으셨구나. 간고한 살림에 온 집안을 짊어져야 할 시련 속에서도, 어린 자식이 폐쇄병동을 오가야 하는 큰 아픔 속에서도 사량 분별에 흔들림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셨던 그런 아버지가 계셨기에 힘든 마음의 병을 앓으면서도 나는 중심을 잡을 수 있었구나.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조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으로 가르치시고 깨달음을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지난 가을 병상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드린 용돈마저 어머니께 건네시며 나한테 시집 와서 고생만 했네... 위로하셨다는 아버지. 죽을 때가 되니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 속 깊이 감사한 것들 뿐이라며 미소 지으셨지요.

가을 햇빛이 좋아 휠체어에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 앞 산책길을 거닐며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으시라고 할 때마다 마다하지 않으시고 꽃보다 밝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늘 기억합니다.

그러나 힘겹게 병마와 싸우셔야 했던 아버지를 뵐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아픔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육신이 한 번 나고 죽는 것이 옷 한 벌 갈아입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나 생사에 자유롭지 못한 중생의 마음은 그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 계심에 약을 챙겨 드리고 이불을 덮어 드리고 손을 잡아 드릴 수 있는 그 사소함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열반 하루 전날. 너무도 야위어버린 몸을 닦아 드리며 아버지께서는 이제 색신과의 모든 인연도 남김없이 놓으려 하시는구나. 모든 애착과 탐착을 다 내려놓으시고 수개월간 괴롭히던 통증마저 잊으시고 최후의 청정일념을 챙기시는 구나. 이렇듯 말없음으로 생사의 법문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날, 황망히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입관식에서 마지막으로 잡은 아버지의 손이 너무도 차가워, 체온을 잃으신 그 손을 부여잡으며 살아 계실 때 더 많이 온기를 나눠드리지 못한 회한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화장터에서, 그 뜨거운 불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분골함에 담겨 오신 아버지를 안아드리며 다시 생전의 그 온기를 전해 받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잘못을 저지르고 혼날까 봐 한나절을 지붕 위에 숨어 있느라 온 가족을 걱정시키고 다시 내려왔을 때 안도하시며, 괜찮다 하시고 안아주셨던 제 첫 기억 속 아버지의 온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최후의 순간까지 흔들리는 이 마음을 다독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제 아버지께서 저를 처음 보셨던 그만큼의 나이가 되어 저는 아버지를 저 피안으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제 기억 속 아버지의 마지막 유훈 "척지지 마라. 미루지 마라, 진심을 다해 감사하라"는 그 말씀 새기고 새기며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생에 와서 빚만 지고 떠난다며 나는 단 한 평의 땅도 차지할 자격이 없으니 화장하여 뿌려달라고 하시던 아버지. 차마 그 말씀만큼은 따를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정진하고 적공을 해야 아버지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한 저희에게 그 말씀은 더 보은하고 보은하며 살라는 부촉의 말씀으로 알고 정성을 다하여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시고 새 몸 받아 오실 때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마해 오신 내생의 길을 따라 일원회상의 주인으로 그토록 염원하던 대원정각하시고 어둠을 파하는 혜명의 등불을 밝히시고, 자애로운 심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활불이 되어 다시 오시옵소서. 아버지. 그리운 나의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하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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