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⑥] 존경하는 큰오빠 영전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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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⑥] 존경하는 큰오빠 영전에 올립니다
  • 전팔진 교도
  • 승인 2020.05.25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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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동생 진타원 전팔진 교도/ 이리교당

남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우리집에서 처음 발기한

LA교당이 지금은 미주서부교구청 및 LA교당으로 발전하여

미국에서의 개척교화 선봉이 되어 있는 모습을

미국에 오셔서 직접 보셨죠. 그때 오빠는 “임 박사 큰일했네”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고 “너희들은 미국에 온 보람이 있고

집안의 영광이다“는 감격적인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빠 !

오빠가 가신 지 벌써 6재를 맞이하건만 아직도 이생에서의 영원한 이별의 준비가 덜 된 저는 오빠를 착없이 잘 보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속마음과는 달리 여전히 밀려오는 제 가슴에 맺힌 슬픔과 회한은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가시면 오시고 오시면 가신다는 진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90여 성상을 살아오시면서 우리 형제들과 6남매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신 오빠의 절대적인 헌신과 격려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온 저에게는 오빠이시기 전에 아버지 같은 분이셨고 영원한 스승님이셨고 그 은혜를 영생토록 잊지 못할 제 정신의 지주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빠가 20대였을 때, 막내동생으로 태어난 저는 어릴 적부터 오빠에게는 큰 짐이었습니다. 자라면서도 오빠의 각별하신 지도와 가르치심 없이 어떻게 제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올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2년 전에는 미국 LA교당 창립주로서 해외교화의 초석이었던 남편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는 비참한 모습까지 보여 드린 큰 죄인입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대종사님의 은자로서 공도사업에 전념하시다가 일찍 열반에 드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빠는 저희 형제들에게 아낌없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셨습니다.

60-70여년 전 오빠는 저를 집에서 가까운 국민학교를 두고 십리나 떨어져 있는 좀 더 나은 학교로 전학시키시면서 자전거를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시는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그 학교로 전학한 후 처음 본 일제고사에서 반학생 전체의 성적을 등수대로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8번째에 제 이름이 붙어있던 때 하필 오빠가 학교에 오셔서 그걸 보시게 되니 저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수치심에 어찌할 바 몰랐던 기억을 잊을수 없습니다. 그날 늦게 집엘 갔더니 오빠는 평소때보다 더 다정하신 미소로 맞아주시며 “8등 했더라 애썼다. 앞으로 조금 더 노력하라”고 하시던 그 말씀이 그때 저에게는 큰 채찍보다 더 무서운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자라면서 한번도 오빠에게서 큰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오빠의 교육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빠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 법대 다니시던 때 우리집의 생계 수단이었던 복숭아 과수원을 '은00' 뭐라는 사람의 농간으로 통째로 빼앗기고 졸지에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상산종사님의 은덕으로 겨우 원광중학에 말단 교사직을 얻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들 때문에 오빠가 원하셨던 판검사의 꿈도 포기하신 아쉬움이 크셨겠지만 그런 내색은 안 하시고 저희들을 키우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빠가 경제적으로 그렇게 고생하시는 걸 본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작은 오빠도 오빠 몰래 고시준비를 포기하고 서울의 어느 회사에 취직한 걸 아시고 당장 서울로 올라가시어 작은오빠가 고시공부를 계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전국에서 오직 20여 명의 합격자를 내는 고시 제도였기에 고등고시 합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말들이 오가던 때였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우리 식구 모두는 작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숨이 넘어가는 긴장감 속에서 작은오빠 번호와 이름이 불리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던 작은오빠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통곡을 하셨고, 오빠는 물론 집안에 있던 모든 식구들의 울음바다가 되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이 모두 오빠의 그 헌신적인 형제 간의 우애를 몸소 보여주신 실증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고등학교 졸업 후 집안 형편이 넉넉지도 못하니 일찌감치 대학은 포기하고 2년제 사범학교나 가서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고생하시는 오빠를 도와드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졸업하기만을 기다렸었는데 어찌 그걸 아시고 저를 부르시더니 정색을 하시면서 “우리 네 형제 중 너만 대학을 안 가면 나중에 오빠에게 원망심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라시며 그 어려운 처지에서 막내동생까지도 익산도 아닌 서울로 약대를 보내 주셨던 오빠의 그 정성을 어찌 제가 평생 잊을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각에도 미어지는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오빠! 오빠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저는 약사 자격을 얻은 후 서울에서 제약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때 오빠가 모처럼 서울에 오셨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제가 오빠를 종로의 한식집에 점심을 모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름이라 냉면을 시켜 드시면서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냉면은 처음이다”하시기에 저는 “ 정말 이 집 냉면이 소문처럼 맛이 있구나” 이 맛있는 걸 오빠에게 사드리게 되어 혼자 흐뭇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오빠의 그 냉면 맛에는 그동안 이 동생을 가르치시면서 혼자 겪으셨던 남모를 고생들이 오버랩 되시어 이제는 스스로 자활할 수 있게 된 동생을 보시면서 느꼈던 뿌듯함을 그렇게 표현하셨다는 거를 이 어리석은 동생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1970년도 초, 외환은행 장학생으로 선발된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때, 원산 이제성 교무님이 찾아오셔서 LA에 교당을 설립하자는 권유를 받고 원래 우리 집안 내력을 너무 잘 아는 남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우리집에서 처음 발기한 LA교당이 지금은 미주서부교구청 및 LA교당으로 발전하여 미국에서의 개척교화 선봉이 되어 있는 모습을 미국에 오셔서 직접 보셨죠. 그때 오빠는 “임 박사 큰일했네”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고 원불교의 내력을 직접 설명해 주시며 “너희들은 미국에 온 보람이 있고 집안의 영광이다“는 감격적인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부모님은 물론 오빠 언니의 보이지 않는 원력의 힘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런 기회를 주신 대종사님을 비롯한 부모님 또 오빠 언니에게도 큰 은혜를 입었음을 명심하며 살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대종사님 하명 받들어 고향인 진안에서 전주로 이사하신 후 그 곳에서 불법연구회 창립모임을 했던 역사적인 집에서 태어나신 오빠는 종종 “다른 사람들은 대종사님을 찾아가서 뵈었지만 나는 대종사님이 찾아오셔서 나를 보셨다"는 농담을 하셔서 좌중을 웃기시기도 하셨습니다. 대종사님 당시에 직접 모시면서 보고 배우셨던 대종사님의 추모담을 듣고 싶어 하는 많은 교도들에게도 당시의 일화를 자세하게 전하는 대종사님의 혈심 제자이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대종사님을 부처님으로 알아 모셨던 할머니와 부모님 덕에 대종사님 슬하에서 자라며 공부하신 오빠는 가시는 그날까지도 우리 모두의 스승님이셨습니다.

일찍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사정으로 전무출신은 못하셨지만 오빠의 대종사님과 회상에 대한 그 신심은 어찌 저희들이 흉내라도 낼수 있을까요.?

오빠,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오빠! 오빠가 이렇게 저희와 영이별하시게 되면서 저에게는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가시기 전날 밤에도 평소와 같이 저는 퇴근하여 오빠 댁에 가서 저녁 식사로 대용하시던 죽도 잘 드리고 몸도 닦아드리며 잘 주무시라고 인사하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매일 저녁하던 일과였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 저는 집에서 미끄러져 다리가 골절 되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서너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입원하는 대기상태에 있을 때 오빠의 열반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 평생에 청천병력이었습니다.

어떻게 병원 입원실에 누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 한 분뿐인 우리 오빠를 저에게 어떤 오빠인데 그렇게 영이별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가슴이 아리다 못해 속이 터지는 형용키 어려운 아픔 속에서 지금까지도 순간순간 밀려오는 슬픔을 자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빠! 하나뿐인 오빠의 막내동생은 지중하신 오빠의 영결식부터 5재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참석을 못한 불효제로 낙인 찍혔습니다. 더구나 제가 입원해 있던 병실도 병원 장례식장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어서 장례행렬이라도 나가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오빠가 떠나신 후에야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빠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저에게는 평생의 회한으로 남을 일입니다.

그러나 오빠, 오빠가 가신 뒤 지금까지도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에 얽매어 아직도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 어리석은 동생도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는 걸 압니다. 이제 명심하여 평정심을 되찾아 오빠의 완전 해탈천도를 기원합니다.

오빠가 평생 수도 적공하신대로 청정일념으로 가셨다가 바로 다시 오시어 이 공부하신대로 대원정각의 꿈을 이루시고 성불제중의 크신 과업을 완성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부디 편안히 다녀오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이 글은 소태산 대종사의 친견제자 [로산 전성완 원정사]가 원불교 회상에 입문하여 평생을 전무출신에 버금가는 정신으로 공부와 사업에 힘쓰다 지난 3월 25일 97세의 일기로 열반하자 49일 동안 자녀손과 동지들이 올린 고사와 추모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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