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은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프로듀서이다. 이제 이 영화 한 편이 끝나면 고생 끝이라고 생각하던 그녀가 덜컥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만다. 자기가 모시며 일하던 감독이 회식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급사를 하고 만 것이다. 서울 달동네 하숙방으로 어쩔 수 없이 이사하게 된 그녀. 뭔가 비밀스러운 주인집 할머니의 모습도 반갑지만은 않다. 찬실은 가깝게 지내는 배우 소피의 집안일을 돕게 되며 경제적으로나마 한숨을 돌리게 된다. 그녀를 통해 단편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연하의 김영을 만나며 못 해본 연애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고집하는 한 인물의 등장으로 그녀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 영화의 재미를 느끼고자 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영화를 먼저 보고 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감독: 김초희
출연: 강말금, 윤여정, 김영민, 윤승아, 배유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갑자기 찾아온 어렵고도 힘겨운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사실은 지금도 복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는 과정을 웃음과 눈물로 잘 섞어 이야기하고 있다. 감독의 경험이 물씬 풍기는 직업 영화인들의 이야기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경우라 하겠다. 영화의 주인공은 없던 용기를 내어 모든 고통스러운 일을 이겨내고 헤쳐나가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고통이 나에게는 또 다른 축복임을 알게 되는 인물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늦가을을 지나 가장 추운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로 이어진다. 주인공의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을 시간적으로,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장송곡 음악이 들려오며 시작되는 영화는 주인공이 힘든 시기를 맞이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듯 과거를 떨쳐 버릴 것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둠을 가르고 비추는 환한 빛으로써 주인공이 그녀의 이름 찬실(찬란한 열매)처럼 밝고 환한 미래를 열어감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질문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며 지내온 찬실과 죽은 감독과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허당기에 실수투성이며 별로 연기실력도 없어 보이는 소피는 어떻게 배우가 될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많은 여자가 주위에 있음에도 김영에게는 왜 여자 친구가 없는 것일까? 주인 할머니 복실과 죽은 딸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등등. 영화는 툭툭 던져지는 대사와 소소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에게 해석의 여지가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몽환적으로 등장하는 코믹한 ‘장국영’이라는 인물은 찬실이에게는 또 다른 자아이자 무의식이라 하겠다. 그는 찬실의 영화에 대한 꿈과 열정 그리고 좌절을 대변한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며 찬실이가 원하는 답을 내어준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아직은 꿈이 많은 30대(여배우), 꿈이 꺾여버린 40대(전 영화 PD), 꿈을 부여잡고 있는 50대(영화 제작자) 그리고 이제는 꿈이 없다는 70대(주인집 할머니). 그녀들은 서로 다른 세대의 서로 다른 꿈에 대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 사람의 꿈에 대한 여러 모습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은 영화에서 ‘원래 별개 아닌 게 제일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큰 의미 둘 것 같지 않은 소소한 일에 나만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소소하다고 느껴지던 것이 원래 나만의 큰 복임을 선택할 수 있는 복 많은 존재임을 말한다.
박선국 교도
돈암교당
5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