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朝光)지의 악의에 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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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朝光)지의 악의에 찬 기사
  • 박혜현 교도
  • 승인 2020.06.02 16:03
  • 호수 11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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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11
<조광> 6월호의 ‘교주를 생불삼는 불법연구회의 정체’기사 표지.<br>조광지는 불법연구회에 대하여 악의에 찬 기사를 실었다.<br>
<조광> 6월호의 ‘교주를 생불삼는 불법연구회의 정체’기사 표지.
조광지는 불법연구회에 대하여 악의에 찬 기사를 실었다.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의 기틀을 마련한 이동진화 교무가 병으로 휴무하게 되자, 재가교도인 성성원(일타원 박사시화의 조카딸)이 원기22년 4월에 경성지부 여자담당교무로 임명된다.

경성지부 교무들이 제9회 총 대회(원기22년 총회)에 참석차 총부에 내려가 있는 동안 조선일보의 자매지인 조광(朝光)지의 기자가 찾아와 불법연구회에 대해 취재하고 돌아간 후 ‘교주를 생불 삼은 불법연구회의 정체’라는 제목의 악의에 찬 기사를 쓴다. 기사를 쓴 기자 이름도 없는 무책임한 글이었다.

불법연구회 정체의 해부라고 했는데 익산 총부에 내려와 취재도 하지 않고, 경성지부에 남아있는 어린 사람들을 상대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서 황당한 허구기사를 발표하니, 불법연구회를 아는 사람들은 분개하게 된다.

이에 대종사는 “한 기자의 일시적 호기심에서 철모르는 붓장난을 한 듯하다. 5000명의 대중을 거느린 단체의 체면상 사실무근의 말을 듣고 그냥 묵과할 수 없다. 그들과 상대하여 투쟁은 하지 말고, 사람이 가서 실행하고 있는 사업과 불법연구회의 취지를 철저히 설명하여 오해를 없애고 인식을 바로 잡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며 5월 29일에 불법연구회 대표로 이재철과 류허일을 조선일보사로 보낸다.

기사 내용의 사실무근을 이야기하고 불법연구회를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정정기사와 불법연구회의 명예회복을 정중히 요구하게 된다. 조선일보사는 6월초 기자들을 총부에 보내 불법연구회의 사업을 관찰하고 소태산 대종사를 취재한 후 8월에 조선일보 3면에 ‘불교혁신 실천자 불법연구회 박중빈씨’라는 기사를 소개한다. 아쉽게도 조광지에 발표한 사실무근의 기사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의 무책임은 그 당시부터 계속되었나 보다.

원기22년 8월에 황정신행은 종로 보신각 옆에 주단포목점을 인수하여 순천상회라 이름한다. 황정신행은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한 후 화광유치원 원장으로 10여 년간 근무한 인연과 후한 인심으로 순천상회는 종로 포목상회 중 장사가 가장 잘 됐다.

원기23년 초에 황정신행이 총부에서 선을 나고 있는데, 대종사께서 조실로 불러 “기차표 사놨으니 빨리 경성으로 올라가라”고 하자 황정신행이 “재미있게 공부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했다. 대종사는 “허허 가보면 안다”는 답만 했다. 황정신행이 새벽에 경성역에 내려 이화장으로 가는 길에 보니 순천상회에 화재가 나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화재가 진화된 후 불난 집 혼수를 사가면 잘살게 되고 액운을 막아준다는 미신 덕분에 순천상회는 화재 전보다 장사가 더 잘 된다. 방 안에 돈이 수북이 쌓여 점원 9명도 돈을 셀 틈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황정신행이 대종사께 시봉금을 올리며 “종사님, 순천상회 불난 것 어떻게 보셨어요?”라고 여쭈니 대종사는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고 황정신행은 회고했다.
 

우이령 넘어 송추 가는 도중의 계곡
우이령 넘어 송추 가는 도중의 계곡

또한 황정신행은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송추 진달래동산에 별장(현재 한국보육원)을 갖고 있었다. 원기23년 음력 3월경 대종사가 상경하여 ‘정신행이 좋은 땅이 있다는데 구경 한 번 갈 수 있겠느냐’ 하여 황정신행은 주먹밥을 하여 경성지부 교무, 회원과 함께 송추 자신의 별장에 다녀온다. 황정신행은 음식 장만도 하지 않고 대종사 일행을 안내하는 길이 민망하여 솔잎을 뚝뚝 뜯으니 대종사께서 “다음에 과보를 받을 수 있으니 나뭇가지 하나라도 함부로 뜯지 말라” 하신 말씀과 땀이 나서 개천가에서 세수를 하니 대종사께서 “이 물은 아래로 흘러 내려가서 아래쪽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이 물을 먹고 살아가니 아껴야 한다. 어찌 거기에 다 세수를 하느냐?”며 대종사께서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돌아서서 씻으며 손수 시범을 보여서 황정신행은 놀랍고 부끄러웠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다만, 이때 대종사 일행이 돈암동 회관에서 송추까지 다녀온 길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6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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