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병진 수행의 꽃, 무시선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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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병진 수행의 꽃, 무시선법①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06.10 11:27
  • 호수 11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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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21

무시선법은 우리 교법에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본성은 일원(一圓)으로써, 우리 각자의 자성은 진리의 세 가지 요소인 공·원·정(空·圓·正)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이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우리 자성의 공원정을 실생활에서 나투어 쓰라는 것이 곧 무시선법의 골자입니다. 이번 호부터는 이 무시선법의 주요 내용에 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범, 선(禪)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悟得)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 바, 예로부터 큰 도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선을 닦지 아니한 일이 없나니라.’

무시선법 법문은 두괄식입니다. 모든 핵심적인 가르침이 무시선법의 앞부분에 상세히 밝혀져 있습니다.

맨 첫 문장은 우리가 선(禪)을 공부하는 주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이며, 왜 하느냐 하는 것인데, 성품이라는 것은 원래 분별 주착이 없다는 것과 이런 특성을 가진 각자의 성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는 그것이 바로 선 공부라 하였습니다.

분별(分別)이란 나누어 구별하는 것이고, 주착(住着)은 어딘가에 머물러 들러붙는 것입니다. 즉, 한 마디로 우리의 성품은 도시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어딘가에 머물러 존재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허공과 똑같은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허공은 우리가 그 자리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지만, 성품은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상대(相對)가 끊어진[絶對] 자리라고 하며, 오직 깨달음과 관조(觀照)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이라는 말 앞에 ‘원래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별 주착이 원래엔 없지만 때로는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생에게는 무명의 습기(習氣)가 있어서 경계를 대하면 흔히 분별 주착을 일으키는데, 이렇게 일어난 분별 주착을 마치 성품의 작용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보통의 인식수준에 맞춰 ‘원래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 점을 상기해보세요. <정전> 일원상의 진리에서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일체 중생의 본성’이라 했습니다. 만약 나의 본성에 잠깐이라도 분별 주착이 있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저 천지(天地)나 법신불 일원상에도 때때로 분별 주착이 있다고 해야만 하겠지요.)

선은 이와 같이, 그 어떤 분별도 주착도 없어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 성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품을 깨치는 것이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사람이 일체의 분별 주착이 없는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된다는 것은, 본성의 그러한 특성을 실생활에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의 일상에서,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과 인식의 대상에 끌려 포로가 되지 않고,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 신기한 일이어서, 경계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이 순식간에 끌려가고마는 범부 중생의 일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시선법은 누구든 위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며, 실제로도 무시선법을 닦아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체험을 하는 공부인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무시선법은 우리 교법이 밝히고 있는 가장 위대한 공부법으로, 삼학병진 수행의 꽃입니다.

나우의 공즉시색
라도현 교도
화정교당

 

6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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