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의 향기] 내 삶은 모두 동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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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의 향기] 내 삶은 모두 동포은
  • 우형옥 기자
  • 승인 2020.06.23 23:03
  • 호수 11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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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인천교구 의왕교당 정중관 교도

[한울안신문=우형옥 기자] “예~ 샌들 이쁘게 수선해 드릴게요. 그런데 지금 손님이 찾아오셔서 바로는 안되고…. 오후에 오시겠어요?” 아침 8시 30분, 손님이 없는 시간을 찾아 바삐 인터뷰 하러 왔건만, 일찍부터 그를 찾는 손님이 많다. 손님들은 기자를 보자 ‘사장님 잘 찍어주세요’라며 오후에 찾아오겠다 너스레를 떤다. 그는 민망한 미소를 짓는다. 묵묵히 운동화를 수선하며 천천히 입을 연 그의 뒷모습 너머로 작은 일원상이 보인다. 의왕시 내손1동 구두수선샤인의 사장님, 의왕교당 정중관 교도(73)를 만났다.

만나게 한 인연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 보성 산골, 늑대들이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곳이었다. 친구 한명 없던 아주 깊은 산속에서 보성 읍내로 이사를 온 것은 그의 나이 10살이었다. 뒤늦게 국민학교를 다니며 글과 말을 배웠지만, 6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서운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보 배달을 하며 돈을 벌던 어느 날, 숙직실 한구석 ‘5급행정직’이라고 적힌 낡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표지마저 닳아있었어요. 펼쳤는데 뭔 내용인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그 문제집이 그렇게 재밌어요. 뭔지도 모르겠는데 재밌어요.” 문제와 답만 있는 책이 왜 재밌었을까. 자신도 모르는 공부에 대한 미련이었을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그 책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본 그는 만 18살, 기능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발령받은 전화국에서 소개받은 이쁜 아가씨는 원불교를 믿으면 결혼해주겠다고 했다.

공부하게 한 인연

순천으로 발령이 난 후에도 보성교당에 힘이 되기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편도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녔다. 그뿐이랴, 오지에 사는 교도들을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는 등 교도회장으로 교당의 손발이 됐다. “처음에는 결혼하려고 입교한 가짜 교도였죠. 허우대만 멀쩡했지 속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어요. 교당에 와 무뚝뚝하니 말도 잘하지 못하는 저를 자꾸 끌어내 공부도 시키고 사회도 시키면서 사람과 어울리게 하고 가르치고 말하게 하고. 김명기 교무님이 저 사람 만들었어요. 저는 한 것도 없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시킨다고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원불교에 대한 어떠한 확신이 이를 이렇게 움직이게 했을까 궁금했다.

“30년 전인가. 원불교 젊은 교무님들이 심장병 어린이 돕겠다고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모금 운동을 했어요. 그게 보통 일이 아니예요. 이게 원불교입니다. 이때 고생하시던 교무님들이 곧 원불교죠. 그때 감사하다는 얘기를 못 드렸습니다. 건강하시죠? 모임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찾아뵙고 싶습니다.”

그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예비교무들이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하며 수술비를 모금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새생명국토순례단’을 기억했다. 당시 이 소식을 듣고 교무님을 도와 아이와 함께 모금함을 들고 광장을 나가기도 했고, 지역 초등학교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한 학생을 수술시키기도 했다. 교무님들의 페달 질은 수술을 받은 학생과 부모에게도 원불교 자국을 남기고, 그의 마음에도 내 종교 원불교에 대한 깊은 확신을 남겼다. 이제는 원불교 없이 살 수 없다는 그. 그에게 원불교는 삶 그 자체가 됐다. 신발을 만들 때도 수양·연구·취사를 병진케 하는 원불교 수행법을 잊으면 안 된다. 멈춤과 판단, 실행이 빨리 되지 않으면 손님의 신발을 망가트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일은 수행이기도 하다. 작업대 앞에 붙여둔 일원상이 항상 마음을 잡게 한다.

더 사랑할 인연

그는 전화국 은퇴 후,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 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이후 구두·가방 수선 기술을 배워 15년 전 의왕에 자리를 잡고 지금의 가게를 냈다. 50대 후반 새로운 도전에 힘들었지만, 가게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자식들도 좋은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토끼 같은 손주들도 생겨 행복했다. 그러나 10년 전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치매 증상은 잘 다니던 교당을 잠시 못 다닐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어디선가 곶감이 기억력에 좋다는 내용을 듣고 매일 곶감 2알을 구해 요양원의 아내를 찾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두 사람만의 추억을 적어 들려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점점 가족을 잊는다.

“우리 단타원에게 내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더 사랑해야죠. 아내 아니었으면 나도, 우리 애들도 있을 수 없었어요.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일요일에 교당을 다니니까 힘을 내서 버틸 수 있습니다. 교당에서 항상 받기만 하고 갚은 게 없어 큰일이네요.”

청년교화를 돕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당장은 지금처럼 일을 하며 아내를 돌볼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가족교화를 하는 것이 전부다. 작업대 뒤, 선반에 있는 법당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그의 힘이고 꿈이다.

“내가 한 게 없어요. 다 아내 덕이고, 교무님 덕이고, 동료들 또 이름 모를 사람들의 덕이었죠. 제 삶은 전부 동포은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외할머니처럼 간식을 챙겨주려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의 삶에 모두가 은혜였다는 것처럼 그와 함께 지냈던 교무도, 직장 동료들도, 아내도 그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는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외쳤다. “다음에 꼭 신발 들고 오세요!”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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