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 개성교당과 종로교당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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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연구회 개성교당과 종로교당 설립
  • 박혜현 교도
  • 승인 2020.07.01 02:27
  • 호수 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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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12

개성에 살면서 경성지부 예회에 2년간 무결석한 이천륜 회원의 염원으로, 원기22년 음력 11월경에 이동진화와 김영신은 개성에 출장법회를 보기 시작한다. 이때 이천륜 가족 6명과 김영신 여고 동창의 친척들 10여 명이 입교하여 예회에 참석한다.

교무들이 경성에서 개성까지 오가며 예회 보는 것에 여러 어려움을 겪자, 개성회원들은 익산총부에 교무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된다. 드디어 원기23년 2월 3일 김영신이 개성출장소 교무로 파견된다. 개성교무 김영신은 이천륜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교화를 겸했다. 이천륜의 남편 김정호와 개성회원들의 희사로 기와 13칸의 ‘불법연구회 개성출장소’가 탄생한다.

총부에서는 오창건을 파견하여 원기24년 3월부터 석 달간 개성출장소를 수리하여 100여 명을 수용할 만한 회관이 완성된다. 개성출장소는 선죽교가 내려다보이는 개성 시내 덕암동에 위치했다.

대종사는 원기24년 6월 3일에 박창기와 경성지부 회원 여러 명과 함께 개성출장소를 찾아 설법하며 개성회원들을 격려한다. 회관이 마련되고 교화는 활발하게 되었으나 교화 비용이 부족해지자, 김영신의 어머니 이성각(이공주의 언니)은 바느질품을 팔아서 교당 유지에 큰 도움을 준다.

원기26년 개성교당 제2대 교무로 대종사로부터 사기(邪氣)가 떨어진 도인으로 인증받은 이경순이 부임한다. 이경순은 대종사의 분신으로 일체 행동이 대종사의 가르침대로여서 많은 교도가 모여들어 교세가 날로 확장된다. 개성교당은 원기30년(1945년) 광복과 함께 교화의 탄력을 받아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고, 원기31년 4월에는 불법연구회 개성지부로 승격한다. 개성에 출장소가 생긴 지 9년이 되는 원기32년에는 500여 평 건평에 문짝만 해도 70여 개, 정원에 오작교와 인공폭포까지 갖춘 멋진 교당을 장만해 북안동으로 개성지부가 이전하게 된다.

대종사는 원기27년 겨울, 개성교당을 방문하여 교도들에게 유무념 대조법과 상시일기법을 꼭 공부시키고 계문을 잘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이경순에게 신신당부한다. 이때 대종사는 교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내가 교당을 순회할 때는 변소와 마루 밑을 먼저 살펴본다. 청소가 아주 잘 되어 있구나. 이렇게만 한다면 내가 없더라도 나의 법을 잘 펼 수 있을 것이다”고 이경순을 치하한다.

원기35년 6월 개성교당의 입교자는 616명, 예회 출석 인원은 70명이 넘었다. 이경순은 개성교당을 북한교화의 발판으로 삼아 금강청년단을 조직하는 등 산업교화에도 힘을 쏟았으나 아쉽게도 한국전쟁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개성교당에서 깊이 있는 공부와 훈련을 받은 교도들은 한국전쟁으로 경성에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된다. 수도 경성에 교당이 한 곳밖에 없고 경성의 중심지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개성지부 교도들은 종로교당의 창립주(주인)가 되어 경성교화의 한 축을 담당한다.

대종사가 경성에 일원의 법음을 전한 지 30여 년이 지난 원기41년에 서울에 두 번째 교당인 종로교당이 탄생한 것이다.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7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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