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교강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①] 소태산 대종사는 왜 변산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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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강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①] 소태산 대종사는 왜 변산으로 갔을까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07.08 09:38
  • 호수 11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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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를 가다 ①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4년 입산해,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고 교리를 초안했던 변산제법성지 일대.

[한울안신문=강법진] 변산제법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을 위한 인연을 모으고 교리의 강령을 선포한 곳이다. 원기4년 12월 13일 초겨울에 심산구곡 험로를 헤치고 변산으로 입산한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4년간 머무르며, 교리의 강령인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을 제정 발표하고, 『수양연구요론』(원기12년 발간)과 『조선불교혁신론』(원기20년 발간)을 초안했다.

대종사가 변산에 입산한 첫 번째 동기는 원기 원년(1916년, 26세)에 영산 노루목에서 깨달음을 얻고, 구인제자와 더불어 저축조합과 방언공사, 법인성사를 연이어 이루면서 심신 간 휴양이 필요했다. <원불교교사>에서는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시며, 회상 창립의 교리 제도를 초안하시고, 사방 인연을 연락하여 회상 공개를 준비하시며,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지목을 피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방언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영광경찰서에 출석하여 일주일간 조사를 받고 나올 정도로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초기 제자들을 영산에 두고 휴양처로 떠나야 했을 대종사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대종사는 먼저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살게 하고 4개월 뒤, 직접 찾아가 불교와의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월명암으로 찾아와 모시기를 간청하는 제자들로 인해 결국 3㎞ 떨어진 실상사 옆 초가삼간을 매입해 새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이곳이 실상초당이며 현재는 6.25동란 때 소실돼 그 터만 남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조석으로 법문을 설하고 시봉하는 제자들은 산전을 개간해 생활했다.

이곳에서 주로 설했던 법문이 관심입정(觀心入定)과 성불제중하는 방법이다. 이듬해 4월 대종사는 교리의 기본 강령인 사은사요,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대종사의 교화방식이 교강의 이해를 통한 공부에 맞춰지기 시작했고, 정산종사와 함께 불교의 낡은 제도를 혁신해 새 회상을 열기 위한 『조선불교혁신론』 초안을 작업하게 된다.

원기105년은 대종사가 변산에서 교강을 선포(원기5년 4월)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종교활동이 중단 혹은 축소되면서 대종사가 우리에게 던져준 개교의 동기와 교리의 강령이 일상으로 더욱 깊이 파고든다. 전반기에 전북교구 주관하에 치르고자 했던 교강 선포 100주년 행사도 9월 6일로 미뤄졌고, 기념식도 오프라인 참석 200명으로 제한하며 온라인으로 동참케 했다.

지난달 26일, 소태산 대종사가 머물렀던 변산제법성지를 찾아 길을 묻고 싶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코로나19 이후의 우리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변산구곡 굽이굽이 성리법문을 설한 그곳에서 당시 석두거사라 불린 스승님의 물소리를 듣고 싶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스승님의 발자취와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그곳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7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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