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허공과 같이, 무시선법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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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허공과 같이, 무시선법④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07.14 15:51
  • 호수 11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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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24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허공은 텅 빈 공간이니, 마음을 이처럼 텅 빈 허공처럼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할 때처럼 자신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그런 뜻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 같은 마음은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마음 가운데에 좋고 나쁨이라든지, 옳고 그름이나, 있고 없음 등 그 어떤 형태의 이미지[相]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일체의 분별 주착이 없다는 말과 같아서, 너와 나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밝음도 어두움도 없고, 마음도 경계도 없고, 미혹과 깨침도 없고, 해탈과 속박도 없고, 법과 법 아님도 없고, 진실도 거짓도 없는, 그야말로 마음 가운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허공이라는 말 앞에는 ‘청정함’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청정(淸淨)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도무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허공 같은 마음은 더럽고 깨끗함을 모두 벗어남은 물론, 생(生)도 멸(滅)도 없고, 있음[有]도 없음[無]도 아닌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일체 만유의 본질로써,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일체 모든 것의 텅 빈 모습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허공 같은 마음은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없는 우리의 심지, 즉 공원정(空圓正)의 자성을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라도 본래의 이 마음[心地]을 회복하면 이것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으나,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앎[靈知]이 있어서, 경계를 대함에 두루 밝게 비추어 낱낱이 알면서도, 좋다 싫다 하는 등의 분별상을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상에 끌려가 물들고 집착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무시선법의 공부는, 천만 경계에 끌려가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단단하게 붙잡고 단련시키는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이 공부는 오직 안팎으로 밝게 깨어있는 수행을 통해서 성성적적한 자성을 회복하고, 텅 빈 허공과 같은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오면, 자신의 심지 가운데 이미 공원정이 있어서, 몸과 마음이 스스로 진리적 행위를 나툽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계[佛戒]이며, 석가모니불의 수행인 위빠사나와 같은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허공 같은 마음은 무위(無爲)의 마음입니다. 이 무위의 마음 가운데 항상 진리(일원상)의 오롯한 작용이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다가 뭔가를 덧붙이려 하거나, 심지어 이 마음을 지키려고 한다면 본래 갖춰진 자성의 지혜광명이 어그러집니다. ‘안으로 마음을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라는 말은 이러한 뜻입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밖으로 태산처럼 부동함과 안으로 허공처럼 청정함은 결코 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음이 밖으로 태산처럼 부동하면 안으로는 허공과 같은 것이며, 또 안으로 마음이 허공 같으면 반드시 밖으로 천만 경계에 부동하여, 이 두 현상은 안팎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공부인이 이 사실을 모르고 안과 밖을 나누어 각각 이루려고 한다면, 오랜 세월 헛수고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나우의 공즉시색라도현화정교당 교도
나우의 공즉시색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7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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