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신행의 무상보시(無相報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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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신행의 무상보시(無相報施)
  • 박혜현 교도
  • 승인 2020.08.04 13:18
  • 호수 11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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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13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봉도청소년수련원
봉도청소년수련원

원기23년(1938년) 10월에 경영난에 허덕이는 동대문부인병원(옛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을 인수한 황정신행은 병원 건물 옆에 있는 2층짜리 사택에 이사 와서 살게 된다. 대종사께서 상경하면 황정신행은 병원 사택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자주 올렸다.

옛 이화여대 동대문병원 터 표지석.
옛 이화여대 동대문병원 터 표지석.

어느 날 황정신행의 남편 강익하는 식사 전 대종사께 “반야심경을 외울 때에 잡념이 나는데, 천천히 외우는 게 좋습니까? 빨리 외우는 게 좋습니까?” 하고 여쭈니, 대종사께서 “빨리 외우는 것이 잡념이 덜하지요”라고 답하며 사심 없고 알뜰한 염불을 당부한다.

다음은 대종사께서 동대문부인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다. 황정신행이 운영하는 병원은 부인병원이다 보니, 매일 가마솥에 미역국을 끓여야 했다. 병원 식당에서 일하던 아주머니 두 명이 병원 지하실에서 연탄가스에 질식돼 죽는 일이 발생한다. 그 후 귀신이 있다고 무서워하며 아무도 지하실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황정신행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대종사는 지하실에 내려가 둘러본 후, 겁먹고 따라온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요망스러운 것들”이라며 꾸짖고 나오니, 그 뒤로 무서움증이 사라져 누구나 지하실에 드나들게 됐다고 한다.

원기24년경 경성지부 예회에는 40~60명 정도가 출석했다. 회원 수가 늘어나도 원기18년에 신축한 법당은 커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으나, 식당은 오래된 건물이라 비좁고 비가 샜다. 신축하려 했으나 공사비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에 원기24년 봄, 황정신행의 희사로 12칸의 새로운 집이 완공되고, 남자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초가집도 기와를 올려 수선한다. 황정신행은 3600원의 공사비를 희사하고도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꺼려해, 원기24년 총부 사업보고서에도 경성지부 회원 제씨로 기록되어 있다.

황정신행은 교단사업을 하면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예수교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교단에서는 일일이 사업성적으로 기록하게 한 것이다. 어느 날 대종사께 “왜 여기서는 사업한 것을 기록합니까? 부끄러운데요” 하고 여쭈니, “사업하는 사람은 무상보시로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고 격려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요”라고 답한다. 이 문답은 <대종경> 교단품 35장에 나온다.

일제는 중일전쟁 후 조선의 사상통일을 위한 시국강연회를 시행하며 대종사께도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대종사는 일부러 말을 어눌하게 하고 못 알아듣는 척하며 강연회 연사로 나가는 것을 모면한다.

원기25년 국민복장을 한 대종사
원기25년 국민복장을 한 대종사

원기25년 일제는 조선 내의 불교를 친일적인 단체로 만들기 위해, 대종사께 일본에 가서 일왕에게 충성 서약하기를 강요한다. 이에 대종사는 상경하여 황정신행이 운영하는 순천상회 건너편에 있는 화신백화점에서 국민복과 군모를 사 입고 사진을 찍는 등 준비를 한다. 원기25년 10월, 대종사는 일본에 가기 위해 박창기를 데리고 부산으로 향한다. 부산에서는 재가교도 박장식이 대종사의 일본행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대종사가 안질 치료를 이유로 미루는 동안 총독부에서는 갑자기 일본행을 취소시킨다.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성적비(봉도청소년수련원 기도 터에 위치)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성적비(봉도청소년수련원 기도 터에 위치)

대종사는 돈암동 회관 이외에 다른 회관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기에, 부산에서 익산 총부로 돌아온 박장식을 대동하고 바로 상경한다. 대종사는 이완철, 이동진화, 황정신행, 박장식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리로 가서 회관 장소를 물색하던 중, 우이계곡 옆에서 잠시 쉬며 “이곳은 장차 수도 도량이 될 만한 곳이다. 앞으로 교화의 서광이 비칠 터전이다”고 전망한다. 이에 황정신행이 사방으로 알아보니 그곳은 일본인 소유의 별장이었다. 훗날 종로교당 봉산 신원관, 도타원 전은덕 교도의 희사로 대종사께서 수도 도량으로 점지해 주셨던 곳에 우이동 봉도청소년수련원이 자리 잡게 된다. 이곳은 수도권 교도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훈련과 정신적 안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8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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