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은 거짓보다 무서운 진리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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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은 거짓보다 무서운 진리의 적
  • 이여진 교도
  • 승인 2020.08.11 10:55
  • 호수 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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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분명 그것을 여기에 두었는데 도대체 어디 갔을까?” 물건을 찾다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일이다. 그것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았을 때, 물건이 제 발로 움직였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 여기’라는 나의 확신은 여지없이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확신! 그것은 얼핏 들으면 참 좋은 말인 것 같다. 특히 신념에 찬 확신은 강한 자신감과 추진력으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는 불굴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 치 앞도 모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확신이란 언제나 맞는 것도, 늘 좋은 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우리는 확신보다는 지나친 확신이 가져올 폐해에 대해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학문, 종교,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신이 불행을 자초한 여러 사례들이 있다. 성리학자들은 공맹 사상에 대한 주희의 해석만을 옳다고 확신하고 그것만을 정통으로 떠받들었다. 그런 이유로 주희와 다르게 공맹 사상을 해석하면 이들은 유학의 법통을 해치고 나라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도적, 즉 사문난적으로 몰려 유학의 반열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에 대한 기독교계의 강한 확신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서적에 금서 판정을 내리고 그를 혹독한 종교재판을 받게 만들었다. 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삐뚤어진 종교적 확신에 의해 공동체의 희생양이 되어 마녀사냥으로 화형을 당했던가?

모든 확신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자신의 상상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그것이 맹목적이 될 때, 그것은 광기가 된다고 설파했다. 아마도 성찰되지 않은 확신은 그것이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모두 망나니의 미친 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리라.

우리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상아탑 학자들의 확신은 사상의 자유가 꽃피울 수 있는 싹을 일찌감치 잘라버린다. 우리만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정치집단의 확신은 독재정치의 절대악으로 변질할 소지가 농후하다.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부모의 확신이 때로는 아이를 자살로 몰아가고, 사랑의 매를 확신하며 회초리를 드는 교사의 훈육은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고 폭력이 된다. 확신이 강할수록 호불호는 강해지고, 나만 진리의 편이며 나의 반대자들은 모두 거짓이고 허위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활개를 치면서 상대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그러면서 반성하고 자책하며 후회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예측 불허의 시대다. 작년 이맘때 우리가 이렇게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코로나19를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런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는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 집단들이 너무 많다. 여기저기서 제대로 성찰되지 않은, 확신에 찬 주장들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동일한 질문에 상이한 답을 내놓으면서 서로 자신만이 옳다고 상대를 향해 큰 목소리로 내지른다. 내 맘속에서, 내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의 싹이 자라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확신은 거짓보다 무서운 진리의 적일 수 있다는 것을.

한울안칼럼이여진강남교당, 원불교교사회
한울안칼럼
이여진 교도
서울교사회장. 강남교당

 

8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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