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하여도 동(정)하는 바가 없이 - 무시선법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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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하여도 동(정)하는 바가 없이 - 무시선법⑤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08.1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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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25

“동(動)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靜)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동(動)한다는 것은 경계를 향해서 육근(六根)을 작용함이고, 정(靜)하다는 것은 육근에 일이 없다, 즉 육근을 작용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위 구절은, 경계를 향해서 육근을 작용해도 작용하는 바가 없고, 육근을 작용하지 않아도 또한 작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체로 모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의할 점은 ‘동하는 바가 없다, 정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그 드러난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실상(實相)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먼저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이 아무 일 없거나 또는 가만히 있거나 하면서 육근작용을 하지 않을 때, 그렇다고 우리는 그냥 바위나 죽은 나무와 같지 않습니다. 육근이 모두 쉬고 있어도 그것들을 거느리는 한 물건 -이 육신의 주인공인 성품의 앎(자성의 혜광)은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깨어있습니다. 그래서 육근은 쉬고 있더라도 그 주인은 똑같이 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이렇지 않습니다. 거의 성품의 지혜광명이 가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무기(無記), 또는 망상이나 분별주착 상태라고 합니다. 때문에 마음이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으려면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즉 평소 가만히 앉아있는 것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육근이 쉬고 있을 때 성성적적한 마음이 되어, 안으로 참으로 텅 비고 고요함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동시에 마음이 안팎을 다 통하여 막힘이 없는 데에 이릅니다. 이때의 마음은 생생하고 활짝 깨어서 없지도 있지도 않으며, 경계와 간격이 없어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가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음입니다. 육신은 정하지만 성품의 공적영지는 전혀 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다음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이’는 전자와 반대의 경우입니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임자 없는 돈다발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돈을 집어가고, 어떤 사람은 그 돈에 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에 손을 대고 안 대는 행위만 가지고 그 행위의 실체를 판단할 수가 있을까요? 즉, 돈을 가져가면 삿된 사람이고, 돈에 손도 대지 않으면 바른 사람일까요? 얼른 보면 그렇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돈을 집어서 바로 파출소에 갖다주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돈에는 손도 대지 않더라도 내심 욕심이 생겨서 ‘저 돈을 집을까, 말까?’ 하고 망설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실제로는 동하지 않은 사람일까요? 이렇게 사람이 육근을 작용하되 경계에 끌리어 분별하고 주착하지 않으면 ‘동하여도 동한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음은 실은 두 가지가 아니며, 진공묘유를 동할 때와 정할 때로 나눈 것뿐입니다. 즉 성품의 공적영지는 동할 때와 정할 때가 각각 다르지 않으며, 단지 밖으로 드러나 있는 행위가 달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동할 때의 마음이 정할 때의 마음과 같아서 늘 진공묘유가 막힘이 없습니다. 위와 같이 동과 정이 한결같은 것을 동정일여(動靜一如)라고 합니다. 우리 원불교인들은 행위 유무와 상관없이 공적영지의 작용이 늘 한결같도록 수행하라는 뜻이죠.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음’을 다른 말로는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이라 하고, 또는 ‘동하여도 분별에 착(着)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다고 합니다.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3장 60절)

가령 할아버지가 손주와 놀아줄 때, 기쁨 슬픔 성냄 두려움 좋아함 싫어함을 다 보여주면서도 실제론 그것에 끌려감이 없듯이, 수도인도 천만 경계에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다 보이면서도 실제론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아서, 안으로 애증(愛憎)을 모두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동중정의 무시선입니다. 재색명리(財色名利)에 있어서도 밖으론 범부와 다름이 없으나 실은 그것에 전혀 속박되어 있지 않는 것이 동중정입니다.

또한, 밤이 깊을수록 하늘의 별빛이 잘 드러나고, 주위가 고요할수록 작은 소리조차 크게 들리듯이, 마음이 텅 비어 안팎이 없는 때에 성품의 공적영지가 두렷하고 오롯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묘수를 찾으려 머리를 많이 쓰면 도리어 지혜가 막히고, 조용히 앉아서 잡다한 생각을 쉬면 빈 마음에서 문득 밝은 지혜가 솟아납니다. 이것이 정중동입니다.

장인(匠人)이 뜨거운 쇠를 다루고 검객이 날카로운 칼을 다루듯, 동중정 정중동은 공부인이 천만 경계에서 공적영지를 바르고 온전하게 지니고,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나우의 공즉시색라도현화정교당 교도
나우의 공즉시색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8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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