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다시 사무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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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다시 사무여한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08.18 21:42
  • 호수 11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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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비일상으로 바꿔놓았다. 코로나19 초반에는 이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왔는지, 불확실한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얘기하고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8개월여가 지난 지금, 어쩌면 이 모든 논의와 물음들이 멈추지 않았나 생각된다.

최근 들어 일부 교회와 단체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확진자가 세 자릿수를 웃도는 현상을 보고도 놀라움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의식전환에 있다. 바이러스는 인간이 저지른 인과임을 알기에, 일각에서 철없는 어른들이 자신의 과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또다시 우리사회를 어지럽히는 모습이 안타까운 것이다.

적어도 한국사회는 코로나로 인해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더 깊어졌다.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국에 제자들과 저축조합운동을 하고, 방언공사와 법인성사로 교단을 이룬 원불교는 더더욱 종교의 공공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최근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위해 각 교구와 원불교봉공회가 긴밀한 연대로 수해민들을 도운 사례는 대사회활동의 좋은 본보기다.

다만 대종사께서 저축조합과 방언공사에 그치지 않고 법인성사를 통해 천의를 감동시켜 법계 인증을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는 시대에 따라 일대전환의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 구인선진이 ‘창생을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서약으로 백지혈인을 나투어 대종사께서 다시 살렸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그 절체절명의 결단과 선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불교를 창교한 뜻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당당히 앞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죽을 폭 잡고 세상을 위해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언택트 시대, 과학문명의 발달 속도는 너무 빠르다.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든 변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다. 만일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온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예전의’ ‘예측가능한’ 미래는 아닐 것이다.

뉴노멀의 세상,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서원을 세워가고 있는가.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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