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칼럼] 큰 서원과 참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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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큰 서원과 참 신앙
  • 전정오 교도
  • 승인 2020.08.18 21:47
  • 호수 11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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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교당 전정오 교도
전정오분당교당 교도회장건국대 겸임교수
전정오
분당교당 교도회장
건국대 겸임교수

원불교는 어떤 종교냐고 물으면 대부분 교도들은 마음공부 하는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려면 크든 작든 원(願)이 있어야 하고, 큰 원을 세우려면 믿음이 강해야 한다. 부처가 되려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불제중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실제 입으로는 성불제중의 큰 서원을 이야기하면서도 진정으로 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운 교도는 얼마나 될까? 필자가 최근 들어 조석심고 하면서 성불제중의 서원을 갖게 해달라고 법신불 전에 간절히 기원하는 것도 큰 서원을 못 세워 마음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불교 교도들은 신앙적인 측면보다는 수행적인 측면을 많이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정산종사께서는 밖에서 신앙의 대상을 찾는 타력신과 안에서 믿음의 근거를 찾는 자력신 모두의 병진을 강조했다. 우리가 교당을 다니는 주된 목적은 신앙이어야 한다. 성리공부에 바탕한 신앙도 중요하지만 우선 30계문을 잘 지킴으로써 교도의 기본자세를 갖춰야 한다.

한학자 유산 유허일 선진께서 강연하고 아주 낮은 평가등급을 받았다. 대종사께 “제가 아무려면 10대 소녀보다도 강연을 못하겠습니까?” 하니, 대종사께서 “허일이는 30계문을 외우는가?” 하고 물으니 얼굴이 빨개졌다고 한다. 그 후 3일 동안 대각전에서 큰 소리로 30계문을 외웠다는 일화가 있다. 대종사께서 계문을 건성으로 읽고 넘어가는 유허일 선진을 주의시킨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그만큼 계문을 중요시했다. 계문을 잘 지키고 일상수행의 요법 대로만 살 수 있으면 그것이 참된 신앙인이요, 부처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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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수행을 잘하는 교도들을 보면

그 분위기 속에서 서로 힘이 되어

신심 약한 사람들도 힘을 얻는다. 


실천 없는 종교의 신앙과 수행은

교양과 철학 공부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싶어 교당에 온다. 그런데 교도들이 친목도모 한다고 지나친 음주를 하거나 교도에 대한 뒷담화하는 모습을 초입 교도들이 보면 실망이 클 수 있다. 반면, 신앙과 수행을 잘하는 교도들을 보면 그 분위기 속에서 서로 힘이 되어 신심 약한 사람들도 힘을 얻는다.

<한울안신문>에 게재된 신앙수행담을 읽다 보면 교당에 다니면서 변하는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을 보고 그 배우자와 자녀가 입교하는 사례는 다분히 많다. 가족교화를 중시하고 있으나 가족교화가 힘든 가장 큰 원인이 교도로서의 모범을 보여야 할 부모나 조부모가 신심과 수양력이 부족하거나 일상생활에서의 마음 씀씀이가 일반인과 별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천 없는 종교의 신앙과 수행은 교양과 철학 공부하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교도들이 스승의 인격을 흠모할 때, 오롯한 신심이 생길 수도 있다. 필자의 할머니 동타원 권동화 종사는 가슴 한가운데 늘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사셨다. 대종사 관련 말씀을 하실 때면 언제나 눈가에 존경심이 가득함이 느껴졌다.

정산종사께서는 “지도자가 제자들의 신심을 시험하는 수가 있는데, 그때 그 사람이 스승의 인격을 인증하였을 때는 신심을 오롯이 바치려니와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신심에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니,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사람의 신심을 보는 것이요, 특별히 시험해 볼 것 없다”고 했다.

신앙을 바탕으로 교무는 교무로서의 역할을, 교도는 교도의 본분을 충실히 할 때, 서원과 신심이 날로 증진돼 교화가 절로 이뤄지고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웃다 보면 진짜 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일단 큰 서원을 세워보자.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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