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의 향기] "경전에만 머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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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의 향기] "경전에만 머물지 말라"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09.01 15:13
  • 호수 11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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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당 정산 김성훈 교도
한강교당 정산 김성훈 교도
한강교당 정산 김성훈 교도

원불교 신앙생활 한 지도 어느덧 64년,

이제 그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다며 매일 저녁 심고를

올리며 ‘오늘도 없는 듯이 살았는가,

주변 사람들을 부처로 모시고 살았는가’를 돌아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한울안신문=강법진] “매일 밤새다시피 일했어요. 어떻게서든 보릿고개를 없애보려고 농민들에게 기술교육하고 전국에 배포할 교재 만들고 그랬죠. 공직생활 한창일 때는 일요일도 없어서 법회가 끝나자마자 법당을 나왔으니 교무님에게 늘 미안했죠.”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에는 시도 농촌지도소장으로 일하고, 이후 정년까지는 수원 농촌진흥청에서 공보담당을 맡으며 농민들의 농업기술증진에 역할을 다한 정산 김성훈(83·한강교당) 교도.

“그때는 지금 농촌과는 많이 다르죠. 나보다 더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회고한다. 바지런함은 천성이요, 조상 대대로 벼슬한 분들이 많았으니 공직의 삶이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불교 신앙생활 한 지도 어느덧 64년, 이제 그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다며 매일 저녁 심고를 올리며 ‘오늘도 없는 듯이 살았는가, 주변 사람들을 부처로 모시고 살았는가’를 돌아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열정을 다해 살아온 만큼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휴양의 도로써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그를 법인절을 앞두고 만났다.
 

인연복 짓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중학교 시험을 치지 못했다. 마침 6.25전쟁이 터져 일찌감치 학교를 포기하고 사랑방에서 집안 어르신을 모시고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으니 그를 안타까워하는 또 다른 어르신의 권유로 열일곱 살에 동생들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했다. 다시 활동기를 맞은 그는 고향집 근처의 남원 산동교당을 찾아 입교를 하고, 당시 남원지부장인 훈타원 양도신 종사를 평생의 법모로, 그 제자 이산 박정훈 종사를 법형제로 맺어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늦은 학업이었지만 배움에는 남다른 소질이 있어서인지 전주고등학교 입학도 무난히 통과하고 연화촌 7대 회장을 맡아 이제성·박제권·양혜경 선진들과 교류했다.

집안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 대학교(전북대 농과대)까지 마친 그는 어딜 가나 게으름 피울 줄 몰라 주위에 환영을 받았다.

한번은 대학 동아리 활동 중에 만난 함석헌 선생에게 정산종사를 한번 뵙기를 청하자 기꺼이 총부를 방문해 주었다. 두 분의 만남이 있은 후, 함석헌 선생은 “내가 태어나서 그(정산종사)처럼 맑고 밝은 얼굴은 처음 뵀다”고 말했고, 정산종사는 “견성한 분이다”라고 함석헌 선생을 칭송했다고 한다.
 

마음공부 길을 열어준 선진

집안 어르신의 가르침 덕분에 일찍이 한학에 통달했던 그에게는 공부할수록 의문이 들었다. “그 좋은 글을 두고 왜 당파 싸움을 할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어요. 그러다 대종사님의 법을 만나 마음공부에 공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양도신 법사님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평생을 법모로 모시고 살았던 양도신 선진은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을 강조했다. 앉아서만 선할 것이 아니라 걸어다니면서도 일하면서도 선해야 한다며 “좌선에서 좌(坐)는 어느 때든지 마음을 안정시키라는 뜻이라고 늘 말씀하셔서 마음공부의 표준으로 받들고 살았어요”라고 한다.

한번은 법형제로 지냈던 박정훈 선진이 전주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 그의 방을 찾아온 적이 있다. 학업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그는 책상 위에 ‘인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여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걸 본 박정훈 선진이 “너무 딱딱하고 고통스러운 문구”라며 며칠 뒤 ‘정관(靜觀)’이란 붓글씨를 써서 그에게 선물했다. 마음을 고요히 하라는 그 글귀에 그는 평생의 공부 표준으로 삼았다.
 

처처불상 사사불공

공직의 삶이란 늘 그렇듯 녹록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을 마치고 폐허가 된 한국사회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농촌이 살아나야 한다는 철칙으로 그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청렴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경전에 머무르지 않고 생활 속에서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 마음 덕분’이었다. 그는 이것이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교법만의 특징이라며 자신부터 “집 안에 있을 때는 내 가족이 부처요, 집 밖에 나가면 만나는 그 사람이 부처”라는 소신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아쉬움이 있다면 공직에 매여 살아온 세월 동안, 육신으로나 물질로나 교단에 넉넉히 봉공하지 못한 그것뿐, 평생의 도반이 되어준 부인(본타원 강영훈)과 사위(김원술)가 같은 교당 교도로서 신앙을 이어주니 이보다 더 넉넉할 수가 없다.
 

9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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