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작용이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 - 무시선법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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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작용이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 - 무시선법⑦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09.08 14:32
  • 호수 11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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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27

「(이같이 한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될 것이니… 」

성품이 곧 법(法)이니(정산종사법어 원리편 3장), 우리의 자성이 곧 진리요, 진리는 곧 공원정(空圓正)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분별이 정(定)을 여의지 아니할 때에 우리의 육근동작은 낱낱이 공원정의 자성에 부합됩니다. 즉, 모든 행위가 ‘텅 비고 밝으며 또한 그릇됨이 없는’ 진리의 작용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볼 때도 공원정이요, 들을 때도 공원정이며, 먹을 때도, 일할 때도, 생각할 때도 공원정의 진리작용을 나툽니다.

사람이 자성을 떠나지 않으면, 앉고 눕고 걷고 먹고 자고 싸고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공원정(空圓正)의 진리작용 그대로라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진리적 수행법인 무시선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정말로 자성을 떠나지 않으면 육근동작이 하나하나 다 진리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수행으로 직접 체험을 못했기 때문에, 자성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공원정의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이 정(定)을 여의지 않고 있으면 나의 육근동작은 언제나 자성의 계(戒)가 지켜집니다. 즉, 내 심신의 모든 행위가 시비선악을 초월하여 그릇됨이 없다[無非]는 뜻입니다. 자성의 계란, 내가 계를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자성의 정혜(定慧) 속에 있으면 자성의 계(戒)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을 말합니다. 분별이 정을 여의지 않으면(=自性定慧) 육근작용이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된다(=自性戒)는 말이 이러한 뜻입니다.

앞에 나온 바와 같이, 마음이 동(정)하여도 동(정)하는 바가 없으면, 그 분별이 모두 정(定)을 떠나지 않으므로, 육근작용 하나하나가 다 공적영지의 성품작용입니다. 이것은 정·혜·계가 셋이 아니라 하나[同一體]이며, 공·원·정이 셋이 아니라 하나[同時性]라는 뜻입니다.

더 설명을 보태면, 정(定)을 여의지 않는 분별이란 텅 비어서 상(相)이 없고 착(着)이 없는 지혜이며, 이를 다른 말로는 정념(正念) 혹은 무념(無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만 경계에 응(應)해서 이 무념을 사용하는 것을 응용무념(應用無念)이라 합니다. 즉, 일체 경계에 상(相) 없는 지혜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용무념이란 바로 무시선법을 말합니다.

위와 같이 진리적 수행이란 의지를 굳게 세워서 힘껏 노력하는 유위(有爲)의 공부가 아니며, 천지가 행하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작용처럼, 자기 성품에서 나투는 영지를 따라서 저절로 행해지는 무위의 공부입니다.

또한 전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무시선법은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과 원리가 같고 결과도 또한 같습니다. 위빠사나는 자신의 몸[身]과 감각[受], 마음[心], 인식의 대상[法]에 주의력을 집중하는데,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바라보기만 합니다. 누구나 처음엔 망념과 분별 주착이 계속 일어나서 방해를 받지만, 점차 밖으로 내달리던 마음이 어느 순간 안팎(자기 마음과 바깥 경계)을 동시에 비춰볼 수 있게 되고, 이렇게 해서 수행이 깊어지면 일체 모든 것이 단지 일어났다 꺼졌다[起滅] 할 뿐,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음[空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경계에 사로잡혀서 집착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반야(공적영지)의 혜광을 따라 한결같이 공원정을 나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시선법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우의 공즉시색라도현화정교당 교도
나우의 空卽是色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9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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