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원기25년 경성지부에는 이완철 남자담당교무, 성성원 여자담당교무, 이경순 서기(부교무), 정윤재 감원(공양원)이 교화를 담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경순은 돈이 든 책상 서랍을 잠그고 열쇠를 그대로 놓고 외출을 하고 돌아온다. 마침 경성지부에 머물고 있던 대종사께서 이를 보고 “경순아, 열쇠는 잘 간직해야한다. 견물생심이라 돈을 보면 집어가고 싶은 마음이 난다. 경순이는 공금을 잃은 죄, 가져간 사람은 남의 돈을 훔친 죄, 누가 가져갔을까 하고 의심하는 죄 이렇게 세 가지의 죄를 짓게 된다. 공금을 취급하는 사람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며 주의를 준다. 이후 이경순은 평생 공금관리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이 법문은 실시품 17장과 관련이 있다.
황정신행은 몇몇 신문기자들을 불법연구회에 입교시키고, 특히 춘원 이광수와 그의 부인을 돈암동 회관에 데려와 설교 듣도록 안내를 한다. 대종사가 상경하자 황정신행은 이광수 내외를 만나줄 것을 간청하며 이광수의 법명을 내려달라고 부탁하는데도, 대종사는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법명(제만)만 내려줄 뿐 이광수와는 거리를 뒀다. “이광수는 초견성은 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으나 끝내 교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이광수는 불법연구회 돈암동 회관을 내왕하며 송도성과 서대원, 전음광을 만나 보고서 원불교 3대 천재라고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원기35년(1950) 박장식은 유일학림(현 원광대학교) 교가를 이광수에게 의뢰해 받게 되는데, 그 곡이 성가18장 ‘불자야 듣느냐’(불자의 노래)이다. 이광수는 한국전쟁 때 납북됐으니, 성가 18장의 가사가 이광수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다.
원기25년 말경 황정신행은 대종사와 자신의 모교인 이화여전 교장 김활란에게 점심을 대접한다. 김활란을 만나본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그녀는 철학박사로 이화여전 교장이 되어 조선 여자들의 교육에 힘쓰는 큰일을 하고 있다. 유순하고 얌전하며 묵중하여 사기가 없는 진인이다. 그러나 나는 도학에 뜻을 둔 너희들을 김활란과 안 바꾸련다. 이 회상에는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니니, 한 세상 안 난 폭 잡고 열심히 공부하거라”하며 도학에 뜻을 둔 제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원기27년(1942) 5월경 대종사는 박창기와 함께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익산으로 내려간 적이 있는데, 얼마 후 총부 예회에서 제자들에게 비행기를 탔던 감상을 이야기한다.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하여 대화는 필담으로 하고 솜으로 귀를 막게 했다. 나는 비행기에 타서 창기에게 안심 입정하라 하고, 나도 굳은 신념으로 무사 통과의 심고를 올리고 도중에 고장이 나서 죽는다 해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각오하고 고요히 선정에 들었다. 얼마 후 창기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뜨니 ‘부여 통과’라고 쓴 것을 보여주고 조금 후에는 ‘이리 통과’라고 알려 주었다. 조금 지나서 무사히 총부까지 오게 되었다. 그대들도 온갖 경계를 당할 때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항상 굳은 신념을 갖고 안심, 안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죽을 고비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초연할 수 있다”고 감상담과 함께 법문을 내린다.
대종사는 장충단 옆에 있는 일본 사찰 박문사(현 호텔신라)에서 불교 종단의 법복과 법락을 구입해 익산 총부로 가져간다. 세탁부에 건네며 이 법복과 법락을 참조하여 불법연구회의 법복을 만들어 보라 지시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230여 벌의 법복은 원기27년 총회 때부터 2년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는데, 이 법복은 원기28년 대종사 열반식장에서 상복으로 쓰이게 된다.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