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떠오르는 그리운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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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떠오르는 그리운 어머님
  • 정형은 교도
  • 승인 2020.09.22 17:53
  • 호수 11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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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 청소년문화연대킥킥대표
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
청소년문화연대킥킥대표

신혼 시절 애를 봐 주겠다고 오신 시어머님은 예순일곱이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16년간 같이 살면서 내가 모르는 노인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줬다. 늙는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노인의 심리와 욕구, 세대 간 대화 등 많이 배웠다. 노인에게 다 해드리려 하지 말고, 무엇을 원하는지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 계세요”는 노인을 무력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 어머님 생각을 먼저 여쭙거나 이러면 어떨까요? 라고 의견을 여쭤보곤 했었다.

어머님의 강점이자 나의 약점인 살림은 어머님의 영역으로 드리고, 나는 기꺼이 보조자 역할을 했다. 아이 키우기는 서로 의견을 나눠보고 어머니는 돌봄과 안전, 나는 아이의 인지 능력과 정서적 경험을 풍부하게 갖도록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어머님과 함께 시장 보고 설거지를 하지만 요리와 청소 등은 어머님이 해줬다.

주변에서 젊은 새댁이 시골 어른과 어찌 사느냐며 걱정도 하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친정 어머니보다 더 편안해졌다. 내가 불편한 것을 말씀드리면 어머님은 그러냐? 하며 받아들이고 생각의 차이가 있어도 서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됐다. 돌아보면 그때 생각에 시골 농사와 종갓집 맏며느리로 큰 살림을 하며 호령하던 시어머님이 도시의 좁고 낯선 아파트 문화 속에서 위축되지 않게 하는 게 필요하다 싶었다. 당신의 삶을 긍정하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도시는 내게 익숙하지만 살림, 육아, 농사, 명절, 가족관계, 전통 등 어머님이 오래 쌓아온 강점이 너무 많았으니까.

언젠가 친구들이 나더러 “네가 시어머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시어머니가 너를 모시는 것 아니냐?”며 웃곤 했는데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래, 우리는 서로 모시고 있다.” 어머님이 원하는 건 웬만하면 먼저 해드리고 어머님도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줬다. 어머님 모시고 절에 가고 병원 가고 친척들 뵈러 가고, 우리 집을 동네 할머니들 사랑방으로 만들어드렸다. 간식을 준비해 놓고 찾아오는 친구 분들을 환영하며, 화투 치시라고 동전을 모아드렸다. 그리고 나는 직장 끝나고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하고 싶었던 일을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어머님이 당당한 노인으로, 지혜를 끝까지 발휘하며 발언권을 갖도록 하는 것! 나중에 작은 TV를 사서 내게 필요한 건 따로 보긴 했지만, 끝까지 우리 집 TV 채널권 1위를 지켜드렸다. 아들이 대학 입학 자기소개서에 할머니의 죽음이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서 자기를 낳아준 건 엄마지만 키워주신 건 할머니라고 쓸 만큼 시어머님은 우리 집의 어른으로 끝까지 존엄한 분으로 사셨다.

나도 그런 노년을 보내고 싶다. 당당하게 내 삶의 경험과 지혜를 살려 나가고, 선택과 결정을 계속 할 수 있다면 치매도 다른 병도 찾아오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더라도 예쁜 치매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의 강점을 발견하고 키워주고 그런 지위를 만들어드리면 질병과 외로움과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많은 노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강점관점의 접근은 비단 노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소중한 원리이리라. 전대미문의 많은 것들을 경험한 올해, 그래도 어김없이 다가오는 서늘한 가을밤 하얀 달을 바라보며 그리운 어머님을 떠올린다.

 

9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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