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의 마지막 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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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의 마지막 상경
  • 박혜현
  • 승인 2020.09.30 01:42
  • 호수 11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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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교화 15
불교정전 표지.
불교정전 표지.

원기28년 3월 29일에 대종사는 장남 박광전과 함께 경성을 방문한다. 대종사는 돈암동 경성지부에 10여 일 머물면서 회관 곳곳을 둘러보며 꼼꼼하게 점검한다. 어느 날 법당 옆 조실로 감원 정윤재, 유장순, 서기 이성신을 불러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 나 없이도 살겠느냐?”라고 묻자 제자들은 “살다가 뵙고 싶으면 가서 뵙지요” 하고 답하자, 대종사는 “멀리 수양 가도 뵈어?” 하고 되묻는다.

대종사는 물을 받아오라고 한 뒤 “내 발을 씻겨라. 깨끗이 잘 씻는 것도 알아야 한다”며 어린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한다. 정윤재는 훗날 “대종사께서 우리들에게 원이나 없게 하려고 발을 씻기라 하셨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대종사께서 어린 제자들에게 멀리 수양을 간다고 한 뜻은 무엇을 암시한 것일까? 이때 대종사께서는 앞날을 내다보고 이번이 마지막 경성 방문임을 은연 중에 밝힌 게 아닐까.

대종사는 4월 11일까지 경성에 머물며 개성출장소까지 다녀온다. 이때 황정신행의 희사로 목탁과 경종을 구입해 익산 총부로 가져가는데, 이때 구입한 목탁과 경종은 두 달 후 대종사 열반 발인식에 사용하게 되고, 훗날 원불교 불전도구로 정착한다.

당시 경성지부 서기(부교무)로 근무했던 이성신은 황정신행이 대종사의 뜻이라면 사심 없이 따랐지만, 대종사께서 총부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 하러 경성에 오셔서 황정신행에게 돈을 부탁하는 모습을 뵐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한다.

대종사는 원기25년부터 교과서를 통일 수정하여 원기26년 12월에 초고를 완성한다. <정전>이라 이름하여 원기27년에 전북도경에 간행을 신청했으나 거부된다. <정전>을 일본어로 고쳐 쓰면 허가해준다는 말에 대종사는 “일본글로 인쇄했다가는 불쏘시개밖에 안 되니 무슨 방편을 써서라도 한문에 한글로 토를 달아서 인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하지만 전북도경으로부터 인쇄허가가 여러 차례 거부된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불교시보사 사장 김태흡 스님은 <불교정전>이라 제명을 바꾸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할 것을 권유한다.
 

수영사(불교정전 최초 인쇄소)


김태흡 스님은 당시 경성 박문사 주지였으며, 총독부 고문인 우에노쥰에이(상야) 스님을 교리사찰 명목으로 익산 총부를 방문하게 인도한다. 그 후 총독부로부터 <불교정전> 출판허가가 떨어졌다. 경성 예지동(현 광장시장)에 있는 수영사에서 가제본된 <불교정전>을 박장식이 익산 총부로 가져왔다. 대종사는 가제본 된 <불교정전>을 밤새워 본 후 1,000부를 인쇄하라고 주문했다.

<불교정전>은 원기28년 3월 20일 수영사에서 1,000부가 발행됐으나, 애석하게도 대종사께서 열반(6월 1일)하신 일주일 후 6월 8일에 총부에 도착한다.
 

9면) 원기27년 대종사와 김태흡스님과 상야스님.


대종사는 원기28년 5월 16일 총부 대각전에서 설법하고 오후에 자리에 누우신 후, 쾌차를 보지 못하고 6월 1일 열반에 드신다. 대종사 열반 소식을 듣고 경성지부 회원 성성원은 대종사의 유체(遺體)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알코올을 구해 내려가고, 대종사의 유체를 유리관에 영구보관하자는 의견이 있어 황정신행은 일본에서 유리관을 구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들이 강력하게 화장을 주장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종사의 발인식은 불교시보사 김태흡 스님의 주례로, 원기28년 6월 6일 오전 10시 총부 대각전에서 거행된다.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10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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