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의 공즉시색]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 무시선법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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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 무시선법⑨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10.13 15:42
  • 호수 11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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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29
나우의 空卽是色라도현화정교당 교도
나우의 空卽是色라도현화정교당 교도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시되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하시었나니, 이는 곧 천만 경계 중에서 동하지 않는 행을 닦는 대법이라.」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의 원문은 금강경에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인데, 일반적으로는 ‘마땅히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풀이합니다. 이 앞에 나오는 구절은 ‘이런 고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에 주하여 마음을 내지도 말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딪침과 법에 주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내용입니다. 즉, 보살이 청정한 마음을 내는 방법으로써,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반드시 그 어디에도 끌려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경계에 물듦이 없이, 오직 자기의 순수한 성품작용으로써 행위를 하라는 뜻입니다. <대종경>에도 “자기 마음을 밝고 조촐하고 바르게 길들여, 육식(六識)이 육진(六塵) 가운데 출입하되 물들고 섞이지 아니하면, 자기 생전에 자기의 천도를 마쳤다 하리라(천도품 38장)”는 법문이 있는데, 여기서 ‘육식이 육진 가운데 출입하면서도 물들고 섞이지 않는다’는 말씀이 위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부언하자면, 마음이 아무 데도 주한 바가 없음은 자성의 정(定)이지만, 또한 여기서 홀연히 나투는 그 마음은 자성의 혜(慧)라고 합니다. 즉 누구든지 경계에서 육근을 작용할 때에는 자성의 정에서 나투는 혜, 즉 공적영지로써 행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나 자성의 계(戒: 佛戒)가 지켜지는 것이니, 앞에서 ‘모든 분별[慧]이 항상 정(定)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될 것이라’는 말씀과 완전히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이렇게 ‘주한 바 없는 마음’을 나투는 행위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경계를 대하되 선과 악을 따지지도 않고, 나[我]라고 하는 것도 잊은 가운데 문득 앎[知]이 나타나는 때가 바로 이러한 때입니다. 가장 많이 보는 예가, 나[我]라는 상(相)이 생기지 않은 어린아이의 행동인데, 이 시기에 이처럼 주한 바가 없는 마음을 냅니다. 아이가 인간으로서 매 경계마다 육근을 작용시키지만, 거기에 시비선악 등 일체 관념을 갖지 않으며, 오로지 성품의 공적영지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 아이들은 이른바 지식이라는 것은 없으나, 성품의 정·혜·계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문명화라는 인위적 교육에 길들어지면, 점차 나와 남의 구별, 시비선악 미추의 분별, 곧 마음과 경계의 분화(分化)가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본래 청정한 자성을 거슬러서 분별 주착의 세계에 들어, 스스로 속박의 굴레를 쓰고 고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불법을 접하고, 가려진 자성의 혜광을 회복하는 가르침을 만나면, 그제야 비로소 진리적 수행을 시작합니다. 재색명리에 미혹되지 않고 의식주에 있어서 애착 탐착하지 않는다든지, 과거 굳어진 상(相)을 좇아 관념이나 맹신으로 시비선악에 물들지 않으며, 적적성성한 마음으로 공적영지를 따르는 것이 바로 진리적 수행입니다. 이것이 곧 ‘주한 바 없는 마음’으로써 천만 경계에서 동하지 않는 무시선 수행법입니다.

 

10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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