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이효재 선생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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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이효재 선생님을 기리며
  • 정형은 교도
  • 승인 2020.10.27 11:20
  • 호수 11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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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지난 10월 4일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 이이효재 선생이 타계했다. 부모성 함께 쓰기, 호주제 폐지, 비례대표 여성할당 50%, 동일노동 동일임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등을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아시아 최초로 여성학과를 창설하여 불평등한 여성의 현실을 이론화했고, 분단이 여성과 가족 및 사회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분단사회학을 만드셨다. 여성민우회와 여성단체연합, 정대협 등 여러 사회단체의 결성을 이끄시고 남북 여성의 만남과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적극 나서셨다.

한국 여성운동사에 획을 긋는 주요 문제와 그 해결에 이이효재 선생님은 늘 중심에 계셨다. 변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여성들을 독려하고 응원하며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는 드문 분이셨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 가운데 단 한 명도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한 1979년, 친구들과 공부모임을 만들어 선생님의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을 읽고 열띤 토론도 하고 세계 각지의 여성운동가들과 여성해방 이론에 열광했었다. 그 덕에 처음으로 심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우리가 읽은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쉰이 넘어 내가 늦은 공부를 마치고 2013년 3월 1일 논문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러 친구와 진해에 갔을 때, 선생님은 이미 1997년부터 진해에 내려가 마을공동체 운동을 시작해서 ‘진해 기적의 도서관’을 지어놓으셨다. 처음 뵈었지만, 무척 반가워하셔서 단둘이 오래 한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내내 깊은 울림과 설렘이 가시질 않았다. 선생님은 두껍기만 한 부족한 내 논문을 다 읽으시고 손편지를 보내어 격려해주셨다. 내 마음의 스승에게서 ‘우정 어린’ 편지를 받은 그 감격이란…

2013년 3월 이이효재 선생이 필진에게 보낸 친필 편지글.


한국 사회의 변화는 생각만큼 그리 녹록하진 않았다. 1980년에 대학 학과를 정하려고 교수 면담을 신청했는데 “결혼하고 아이 키우지 않고 왜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라는 첫 질문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2000년에 늦깎이로 대학원에 들어가려던 입학 면접 때 “남편이 공부하는 것에 동의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20년 전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이 났었다. 2020년 지금도 여성들은 취업과 결혼, 육아 등에서 많은 차별과 부담을 떠안는다.

박정희 작가가 쓴 『이이효재』 마지막 부분에서 선생님이 당부하신 말씀을 새기며 힘을 내자고 말하고 싶다. “젊은 여성들이 사고에서 더 자유로워지고 선택을 즐기며 살아나가길 권한다. 자신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해나갔으면 한다.”

올해는 원불교여성회가 창립된 지 25년이 되는 해이다. 처음으로 학술 심포지움을 열어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로 원불교가 나아갈 길을 찾아가는 뜻깊은 자리를 가졌다. 양장 차림을 한 교무 복장이 신선하여 눈길이 자꾸 간다. 여성 교무의 결혼이 이제야 허용되고 원기100년이 넘었지만 여성 구인선진님들의 종사위 추존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현실 속에서 과제를 찾고 앞으로 나아가며 한 발 더 발돋움하려면, 지금 원불교 안에서 양성평등과 여성의 성장을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아지기만 한다면 변화는 오고야 만다. 원불교여성회 초대 한지성 회장님도 하나가 못하면 둘이, 둘이 못하면 셋이 하면 된다고 하셨다. 별을 바라보며 벗들과 함께 밤길을 걷고 또 걷다보면 떠오르는 환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정형은여의도교당 교도청소년문화연대킥킥대표
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
청소년문화연대킥킥대표

 

10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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