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맞이한 불법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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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맞이한 불법연구회
  • 박혜현 교도
  • 승인 2020.11.02 21:20
  • 호수 11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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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원문화해설단과 떠나는 소태산의 경성교화

 

소태산 대종사의 발인식 이틀 후인 원기28년 6월 8일에 경성출장소 2대 교무를 역임한 정산 송규가 제2대 종법사에 취임한다. 이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이 깊어지며 강제 공출과 국방헌금, 근로동원을 강화했고, 예회 때에도 경관이 설교내용까지 검열하며 트집을 잡았다.

총부 남자 청년들은 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업대라는 이름으로 여러 곳에 분산되고, 여자 청년들은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공장과 병원 등으로 나뉘어 취업하게 된다. 총부에 남아 있던 사무요원들조차 산을 개간하고 밭을 일구는 등 증산대원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황정신행이 운영하는 동대문부인병원(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은 김활란의 부탁으로 원기26년 3월부터 3년간 이화여전 부속병원에 위탁 운영되고 있었다. 황정신행의 알선으로 원기28년 9월부터 총부 여자 청년 6명은 이화여전 부속병원에 취업하게 된다. 송자명·김서업·정양진은 병원살림을 담당하고, 송영봉·박은섭·이용진은 간호보조로 일했다.

병원에서 하는 일은 무척 힘든 생활이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소는 병원 4층에 있었는데, 석탄마저 없어 쇠로 된 통에 더운물을 넣어 온기를 유지하며 추위를 견뎌야 했다. 명절 때는 교대로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에 가서 지내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고 송영봉 원로교무는 당시를 회고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여자 청년들은 한 달 월급으로 일본돈으로 15원을 받아서 총부로 보냈다. 훗날 공부할 비용으로 저축하고, 10여 일 야간 근무해서 받은 5원을 용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원기30년(1945) 일제는 군부를 앞세워 한국 불교의 황도화를 추진한다. 불법연구회에도 <정전>과 <회규>까지 그들의 뜻에 맞도록 개편할 것을 강요하고, 익산 총부 대각전과 양잠실에 일본군을 주둔시키며 황도불교화(皇道佛敎化)시키려 압박을 가한다.

이때 정산종사는 지방교화 순시를 핑계로 부산 초량교당에 2개월가량 머물며, 법당 벽에 사은상생지(四恩相生地), 삼보정위소(三寶定位所)라 써 붙이고 시국 안정기도를 정성껏 올린다. 이쯤 일제는 불법연구회 간판을 내리고 황도불교 간판으로 바꿀 것을 종용하는데, 총부 임원들은 종법사께서 지방순시 중이니 순시 마치고 돌아오면 간판을 바꿔 걸겠다고 미루고 있었다.

후일 항타원 이경순 선진은 “원기30년 8월 14일 아침 좌선을 마친 정산종사께서 ‘총부에 갈 때가 되었다. 짐 챙겨라’고 하신 후 초량교당에서 걸어서 부산역으로 가셨다”고 이때를 회고했다. 정산종사는 열차로 익산 총부로 향하던 중, 대전역에서 8월 15일 해방 소식은 듣는다.

원기25년 10월 대종사께서 일왕에 충성서약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 눈병 치료를 이유로 출발을 미루는 사이 일본행이 취소된 점과 정산종사께서 총부 정문에 황도불교 간판을 달지 않기 위해 지방교화 순시를 핑계로 총부를 비우신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훗날 원불교에 신사참배나 충성서약 등 황도불교화 되는 친일행위로 인한 오점은 남기지 않기 위한 두 분 스승님의 크나큰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원기30년 8월 15일 총부에서는 총무부장 송도성의 주재로 ‘해방을 당하여 우리들 당면 급선무는 무엇인가’라는 안건으로 긴급 시국회의를 열어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자는 데 뜻을 모은다. 9월 5일 익산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에서 원불교의 대 사회운동인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이 펼쳐진다.

글/박혜현·정릉교당 교도·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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