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계는 자연스럽게 녹아내려야 한다
상태바
[칼럼] 경계는 자연스럽게 녹아내려야 한다
  • 전정오 교도
  • 승인 2020.11.17 13:28
  • 호수 119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울안칼럼
전정오
분당교당 교도회장
건국대 겸임교수

우리는 늘 경계 속에서 산다. 일상수행요법 9개 조항 중 3개가 경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경계는 왜,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일까? 경계는 다른 사람이 내게 주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만드는 것일까?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뿐만 아니라 생로병사 등 우리 삶 자체가 경계다. 그러나 경계를 경계라고 받아들이면 경계지만, 이를 은생어해로 생각하면 경계를 당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우리가 경계를 당해서도 이(利)를 돌리고, 고에서 낙을 찾으며, 은생어해(恩生於害)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서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가지고 논하면 안된다. 특히 수행에 대하여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잘 안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수행하는 과정에 있음을 알고 다른 사람의 수행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냥 그러냐고 받아주고 내 경험은 이렇더라고 말하면 된다. ‘이렇게 해보니 좋더라’라고 해야지 ‘이렇게 해봐라’고 하면 안된다. 자기 공부만 잘 하면 된다. 남을 절대 평가하고 충고해서는 안된다. ‘교당에 다닌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 그것 밖에 안 되느냐?’와 같은 말을 해서도 안된다.

필자는 교당에서 교무님 설교를 들으면서 아내가 듣고 있는지 합창석을 바라보곤 했다. ‘당신이 꼭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라고 생각하면서….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내도 ‘남편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이나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법랍이 60년이 다 되어가는 최근에 들어와서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부드럽게 해야 한다. 거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그를 이해해야 한다. 그가 거친 말을 해도 나는 부드럽게 하면 된다. 그러나 “왜 나만 부드러워야 하느냐?”고 반문하면 이것이 시비가 될 수 있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내가 복을 받는 것이다. 자기에게 맞게 상대를 고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이다. 즉 상대를 고쳐 내가 편해지려는 것이다. 자기를 참회하는 것이 법문을 듣는 자세이며, 이것을 타인에게 적용하면 시비의 장이 된다. 내 기준에 맞지 않아 화가 난다.

대종사의 가르침을 나에게 적용하면 보약이나,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 하면 비수가 된다. 부부가 법회를 보고 나오면서 ‘교무님 설법 잘 들었어? 앞으로 잘해’ 이렇게 되면 교당을 나와 집에 가는 내내 다투게 된다.

<대산종사법어> 운심편에 보면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은 마음의 자취니 말을 좋게 하면 그것이 나에게 복이 되어 돌아오고 말을 나쁘게 하면 그것이 재앙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느니라. 그러므로 혹여 터무니없는 욕됨을 당할지라도 남을 원망하지 말고 스스로 몸을 살피는 데 힘쓰라”는 말씀이 있다.

평소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 좋은 말씀이라 생각하다가 비교적 큰 경계를 당하면 그러한 법문 말씀은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이들 피아노 선생님이 연습을 하도 해서 피아노 건반이 피로 붉게 물들곤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법문 말씀은 마음에 새기고 새겨 완전히 몸에 체화할 때까지 반복해서 익혀야 할 것이다.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법문 말씀을 전해 주면, 이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화를 내게 된다. 그건 단지 법문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 생각 나기 전에 마음작용이 자연스럽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길은 반복되는 훈련과 수행뿐이다. 화가 치밀어 오는 것은 건강을 위해 참지 말아야 할 것이나, 화 자체가 나지 않도록 마음공부를 잘 해야 할 것이다

11월 20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