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힙스터’가 던진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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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힙스터’가 던진 그것은
  • 임경호 기자
  • 승인 2021.03.09 17:04
  • 호수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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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지난 5일 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노인을 마주했다. 흰색 스키니 바지에 흑백 패턴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있었다. 국방색 캡 모자에 선글라스를 올린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마스크는 블랙, 크로스백을 멋스럽게 돌려 멨다. 손에는 영어로 된 두꺼운 책이 들려있었다. 그의 나이 얼추 70대는 되어 보였다.

노인은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지하철에 사람이 가득했지만 노인의 존재는 단연 눈에 띄었다. 이렇다 할 화려한 치장도 없는데 그는 특별했다. 동년배와 사뭇 다른 패션 감각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노인의 첫인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독특한 분이라고 속으로 뇌까렸다. 그는 이질적이었다.

나는 한동안 노인과 함께 갔다. 지하철역을 몇 차례 이동하는 동안 내 시선은 그에게 머물렀다. 그에게서 비롯된 이질감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내가 정립한 ‘노인의 상(相)’에서 그가 다소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 아마 편견에 대한 반동이었을 터다.

왠지 모를 감정이 일었다. 이유 모를 배덕감도 느꼈다. 그렇게 그를 보다가 이질감의 진짜 원인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원인은 노인의 옷이나 가방이 아니라 모자에 달린 작은 액세서리에 있었다. 부리지도 않은 멋을 풍기던 그의 모자에는 ‘세월호 리본’이 객실 진동에 맞춰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리본을 4년여 전 가방에서 떼어낸 바 있다. 이쯤 하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회적 연대 분위기가 옅어지던 시기였다. 커다란 백팩의 지퍼 손잡이로 2년 동안 달고 다니던 리본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그 리본을 떼어낼 때의 기억이 노인에게서 되살아났다. 이질감은 노인의 외형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비롯된 일종의 파장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리본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리본을 떼어낸 뒤 2번의 이사를 거치며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는 떼 묻은 리본도, 그것을 생각하던 마음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날 나는 꺼진 불씨를 되살리는 심정으로 한 번쯤 이 기억을 반추하겠다고 마음먹었다.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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