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칼럼] 사심 없이 큰일을 이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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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사심 없이 큰일을 이룬 사람
  • 정형은 교도
  • 승인 2021.07.29 19:49
  • 호수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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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정형은<br>여의도교당 교도<br>청소년문화연대킥킥 대표
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
(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

지난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학생, 노동자, 농민, 교사, 교수, 종교인, 언론인 등 29분 포상이 있었다. 유신독재에 항거한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 YH무역 폐업 반대 농성을 하다가 진압 과정에서 숨진 김경숙 열사와 5·18 민주화운동에서 ‘기억해야 할 이들’로 꼽히는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등이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그중에 2년 전 세상을 떠난 부산의 고호석 선생이 있었다.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에서 수인번호 26으로 나온 대학생과 같은 수인번호로 수감생활을 했었다. 그때 고문당해 몸이 건강하진 못했는데, 일 년 넘게 아프더니 골육종암 판정을 받고 석 달 만에 가족과 친지들의 안타까움 속에 저세상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애도하면서 어찌나 슬퍼하고 애석해하는지 애절한 마음이 가득 담긴 추도사들을 들으며 또 한 번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나 슬프고 아름다운 추도식은 처음이었다.

그는 고향 부산을 떠나지 않고 태어나 자란 그곳에서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교육, 노동, 민주화운동, 지역사회의 현안과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장엄한 노래를 부르는 박종철 합창단에도 그의 자리가 있었다. 명예와 권력을 좇아 고향을 떠나거나 지위를 탐하지 않고, 늘 명석하고 냉철한 논리와 따뜻한 진심으로 선후배와 친구들, 친척과 가족, 그리고 심지어 옆집에 사는 이웃들에게도 좋은 사람이었다. 병원에 삼 개월 입원해 있는 동안에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 돌아간 다음에도 그를 그리고 기리는 사람들이 가득하여 그는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에워싸여 있었고 내내 외롭지 않았다.

부인과 딸에게 애틋한 남편이고 다정한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에 추모식이 진행되는 동안 부인은 통곡하였다. 세상을 떠나던 겨울날, 햇살이 비쳐드는 병실에서 부인과 딸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숨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부인은 그가 정말로 아름답게 살았다는 걸 돌아간 이후 더욱 느낀다고, 유품 하나하나를 버릴 수 없어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낡은 가방 안 지갑 속에 딸 사진을 간직했던 그의 다정함에 부인과 딸은 눈물을 터뜨렸다.

추도식에서 추억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모르던 그의 모습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산 어디에나 고호석이 있었다. 사람들이 고뇌하고 힘들어하고 길을 헤맬 때 그는 늘 사람들과 함께였다. 군사정권 때 두 번이나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어 두고두고 후유증을 앓았지만, 그의 생애를 관통한 것은 스스로 말하듯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고 선생님의 사심이 없는 삶이야말로 공익심 있는 삶의 표상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도 사람을 사랑하는 그는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고 위로하며, 옳지 않은 일은 죽기로써 거부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추도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내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내내 생각했다.

원불교 교도로서 나는 ‘일상수행의 요법’ 9조를 좋아한다. 날마다 일원의 진리와 은혜 속에 일원 가정이 되게 해달라는 심고를 올리며 우리 가족이 ‘공익심 있는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아침기도의 노래를 부르며 ‘오늘도 좋은 세상 이루기 위해 모두 함께 보람찬 일 하게 하소서’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7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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