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에서 온 편지] 멈추고, 비우고,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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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멈추고, 비우고, 기다리자
  • 유성신 원장
  • 승인 2021.07.29 20:02
  • 호수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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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4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유성신
오덕훈련원 원장

유독 춥고 폭설이 내린 지난 긴 겨울 축령산에는 눈꽃을 뚫고 노란 생강꽃이 피어나더니 무상의 소식으로 앞다투어 꽃들이 피고 졌다.

죽은 듯한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이곳저곳 눈물겨운 연초록 새싹이 춤추는 사월을 지나 오덕훈련원 드넓은 도량 바위틈 사이에는 환희의 철쭉 동산이 펼쳐졌다. 늦봄부터 내내 긴 장마로 축령산 골짜기 수동계곡에는 산천초목을 진동케 하는 물소리로 묵은 체증이라도 내리게 하는 이곳이 바로 낙원의 세상이었다.

지금은 굽이굽이 산자락 전체가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짙푸른 녹음으로 빛을 드러내고 있다. 저 아랫마을에는 영롱한 아침이슬에 벼포기 사이사이가 굵직해져 가고 눈이 부시게 청량한 오후 노랑할미새 한 마리 지지배배 노래 부르며 휙 날아간다.

이른 봄 오덕훈련원 본관 뒤편에 있는 매실나무에는 흐드러지게 무수한 꽃들이 피었다. 긴 장마에 작은 열매들은 퇴색되어 말라붙고, 굵직한 열매만 골라 두어 바구니 거뒀다. 화려하고 무성했던 줄기와 꽃과 잎과는 다르게 허망한 결실이었다. 열매를 거두고 이리저리 뒤엉킨 잔가지들을 과감하게 자르고 굵직한 가지들만 뭉툭하게 남겼다. 적절한 시기에 나무 주변에 거름도 뿌렸다. 이제 다음 해를 기약해야겠다.

어느 것 하나 공들이지 않고 거둘 수 있는 결실이 있을까? 봄에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 항아리를 수없이 열어 땡볕에 말리고 숙성시켜야 비로소 깊은 맛이 배어난다.

멈추고, 비우고, 기다리며 내실이 충만할 때 내일의 열매가 있다. 공부인도 일속에서 급할수록 멈추고, 내가 능한 것에 자만하지 않으며 수많은 관계 속에서 속히 잘되기를 기대하지 않고, 인고 속에 한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기다려야 한다.

긴긴 겨울 다시 이 산자락에는 수북이 눈이 쌓이고 골짜기는 꽁꽁 얼어붙어 혹독한 추위 속에 긴 휴식기에 들어갈 것이다. 겨울은 멈추고 비우고 기다리며 모든 기운을 나무뿌리에 함축하는 시기다. 이른 봄 벙긋 웃는 매실 꽃 소식이 예감된다.

세계와 국가, 교단 안에서 지금 우리는 작열하는 사막 위에서 온몸이 노출된 채로 태양 빛을 받으며 여기에 서 있다. 천지 기운도 알고, 우리 서로는 서로가 견딜 수 없는 황량함을 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 고비를 넘기는 자에게는 두터운 업이 한 껍질을 벗겨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개인과 단체, 한 세계가 또 한 단계 진급하여 나간다.

7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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