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에서 온 편지] 향기로운 무아봉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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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향기로운 무아봉공인
  • 유성신 원장
  • 승인 2021.08.24 17:17
  • 호수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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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훈련원 정원에 놓인 조형물.

 

이곳에 머물며 그리고 오가는 분들이 심어 놓은

정신·육신·물질의 아름다운 흔적들은

어려운 상황과 위기를 극복하는데 청량제의 역할을 한다.

도량 안팎으로 누군가의 지극한 배려가 있는

마음이 지나간 발자국은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큰 침묵의 울림이 있다.

입추와 말복도 지나 서서히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이 인다. 이 산중에는 밤이 깊을수록 풀벌레 소리가 적막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숨통 조이게 달구었던 한여름을 서서히 삭히고 있다. 심장으로 파고드는 긴 호흡 속에서 여유와 여진이 생겨나는 계절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마음 일으켜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었던 것들도 때가 되면 모든 것은 변화하고 본원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렇기에 뭔가 뒤집힐 것 같은 긴박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평정을 지키고 초연해져야 함을 느끼게 한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스승도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안에 가까이 있다. 가늠하기 어려운 훈련원 구석구석의 우거진 풀들을 예초기와 낫으로 수없는 날들을 베어 냈다. 아슬아슬한 긴 사다리를 타고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나즈막한 곳에 이르기까지 긴긴날의 나무 전지작업이 이루어져 수십 트럭쯤은 잘려 나갔다.

누군가 혜성 같은 인연의 끈이 되어 이 삼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인 노력과 땀을 쏟아 왔다. 도량 안이 점점 윤기가 흐르고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칙칙하게 뒤엉킨 풀숲과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에 툭 트인 여백이 생겨났다. 그 사이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복문이 활짝 열리는 듯하다.

공양간의 주인은 어머니가 가족과 자식들을 대하듯 희생을 달다 하며 쉴새 없이 인정스럽게 최고의 음식을 공양 올린다. 마음 다해 정성 들인 정갈한 음식 앞에서 공양 받는 자의 즐거움은 감사를 알게 하고, 상생의 기운으로 마음을 연하게 한다.

이곳에 머물며 그리고 오고 가는 분들이 심어 놓은 정신·육신·물질의 아름다운 흔적들은 어려운 상황과 위기를 극복하는데 청량제의 역할을 한다. 도량 안팎으로 누군가의 지극한 배려가 있는 마음이 지나간 발자국은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큰 침묵의 울림이 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은 어려운 위기를 수행으로 돌리고 자기를 인내하며 공중에 덕을 심어 실행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참다운 종교가의 개벽과 개혁은 자신의 내적 변화로부터 주변을 향기롭게 하는 것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다.

산과 들에는 자유롭게 허공 향해 피어난 보라색 칡꽃으로 향 내음이 가득하다. 산책길에 저 높은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간 칡덩굴에 저절로 눈길이 머문다. 그것은 순수하게 멀리까지 뿜는 자연의 향에 취하기 때문이다. 주인은 주변과 나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그 일을 미루지 않고 내 일로 여기는 혜안이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거기가 내 집이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어려운 것을 알고 스스로 돕는다.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처한 그곳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묵묵히 그 일을 할 뿐이다. 천 년 만 년 거기에 머물듯이 그 일을 하고도 돌아설 때에는 흔적이 없다. 이러한 공부인이 참다운 무아봉공인이다. 그곳에 무아봉공인이 머물 때 진정으로 향기로운 낙원세상이 된다.

‘내 집 없으매 천하가 내 집이라.

그것이 참 나요. 내 집 내 고향!

삼세의 모든 성자, 거기 사시네.’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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