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합심합력은 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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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합심합력은 공심이다
  • 전종만
  • 승인 2022.04.28 17:02
  • 호수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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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만 수원교당 교도<br>하나병원 원장
전종만 수원교당 교도
하나병원 원장

수원교당의 주말 새벽. 토아팀(토요일 아침을 함께하는 팀)이라 부르는 교도들은 새벽기도 시간이 끝나고 나면 도량 청소부터 행사 준비, 수리가 필요한 곳의 보수작업까지 다른 교도들이 불편 없이 교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교당 구석구석을 살피고 정성의 손길을 뻗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정성에는 변함이 없다. 아마도 전국의 많은 교당에는 수원교당의 토아팀과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고, 그들의 선공후사 정신은 원불교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마음과 힘을 합하는 원동력은 역시 ‘공심(公心)’이다. 미개한 시대에는 한 사람의 사익을 위해 강제적으로 힘을 모으는 것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오늘날처럼 인지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힘을 합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합심합력 하려면 무엇보다 공심에 바탕을 둔 서원 일념이 모여야 한다. 미국인 심리학자 로렌스 콜버그는 도덕성 발달이론에서 어린아이나 미숙한 사람들은 나에게 좋냐 나쁘냐를 따져 행동한다고 했다. 사심(私心)이 행동의 동기인 것이다. 성인이 되어 조금 더 성숙하면 공심이 싹터 내가 속한 사회에 좋냐 나쁘냐를 따진다.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은 좋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와 완전한 양심 즉, 최고 수준의 공심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행동한다. 지구 온난화 방지나 아프리카의 기아 해소를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 순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보통의 도덕성은 양심, 공감, 이타성과 같은 정서적 요소와 자제력, 책임감, 분별력, 공정성과 같은 인지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행동적 요소까지 동반되어 있으면 높은 도덕성과 공심을 갖추었다고 본다. 김대중 전대통령께서 말씀했던 ‘행동하는 양심’은 바로 이 행동적 요소를 강조한 것이다. ‘위선도 많이 하면 참선이 된다’는 말처럼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이타적 행동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심을 양성할 수 있다.

인지행동 이론에서는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굴비자루처럼 묶여 다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 같은 마음이 일어나야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행동을 하다 보면 마음이 따라오기도 한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사심과 공심을 함께 갖고 있다. 따라서, 사심과 공심은 ‘모 아니면 도’식의 이분법적 개념이 아니라 사심에서 공심으로 점점 변화해 가는 스펙트럼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아마도 스펙트럼 선상의 어딘가에 나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마음 한 번 달리 먹는다고 없던 공심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공심을 향해 부단히 행동하고 정진 적공을 할 때 마음의 위치가 1%씩 공심 쪽에 더 다가선다. 팔산 김광선 종사께서는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가장 흠모하여 배우고자 했던 세 가지 중 그 첫째가 순일무사한 공심이며 대종사께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오직 공(公)하나 뿐이요 사(私)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않다고 하였다. 대각의 달 4월. 우리는 대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그 공심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화두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전 교도가 소태산 대종사의 공심으로 똘똘 뭉쳐 합심합력 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은 사심과 공심 사이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가. 공심을 향한 한발 한발의 발걸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대각개교절이다.

4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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