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이번 학기에 영화수업을 듣는다고 한다.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는 아빠의 말을 귀담아 듣는 아들이 고맙다. 수강하는 학생들 중 공대는 본인뿐인 것 같단다. 그동안 자신의 영화 취향을 말하면 대부분 공감 못하는 사람들뿐이었는데 이번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며 놀라워 한다. 영화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눈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누구보다 뛰어난 것 같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훨씬 훌륭한 사람이 많다. 내가 보지 못했고, 찾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무지해서, 귀찮아서, 복잡해지기 싫어서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작은 세상에서 살면 그냥 작은 사람일 뿐이다.
우리 원불교도 작은 세상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수고했다는 격려로, 힘내라는 응원으로 마친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서 보면 우리는 (우리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세상에서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을 수 있고, 훨씬 더 많이, 더 잘 처리했을 수 있다.
최선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힘들다. 일이 쉽지 않다. 왜 그럴까? 작은 세상에서 살기 때문이다. 큰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경계에 있어서만 대소유무를 찾을 것이 아니라 일하는데 있어서도 대소유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피자. 자연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있는지, 인류가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파란고해에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해야 하는지 살피자. 얼마나 할 일이 많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시야를 보자. 교당, 교구, 기관, 교단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
다 할 수는 없기에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 목표를 잘 살펴야한다. 내 생에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회상은 내 생보다 유구할 것이며 후진들은 선진의 모습에서 배울 것이다. 천조의 대소유무의 이치는 우리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소유무의 이치에 따라 일의 시비이해를 잘 운전하도록 하자.
9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