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김덕권 정사가 12일 열반에 드셨다. 고인은 필자가 만난 원불교인 가운데 가장 뜨거운 가슴을 가지신 분이었다. 진리와 대종사님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실행하는 열정과 의지는 자신과 주위를 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법명 그대로 덕화가 만발한 삶이었다.
재작년 고인이 살던 백석 자택에서 오랜만에 뵌 그는 한마디로 암상노호였다. 바위 위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한 마리 호랑이, 거동이 불편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했다. 종교적 신념과 실천으로 체화된 그의 모습은 짙은 흰 눈썹과 함께 진한 감동을 주었다.
그의 서재는 고개를 들면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고개를 돌리면 한강이 보였다. 그 곳에 앉아 오랫동안 직접 써서 보내온 ‘덕화만발’의 원고를 쓴다고 했다. 그렇게 쓴 원고를 모아 《진흙 속에 핀 연꽃》 《덕화만발》 책을 발간 보급했다.
복싱 프로모터로서 정글의 세계에서 살던 그가 원불교를 만난 것은 삶의 일대전환을 뜻했다. 그는 그 길로 즐기던 술과 담배를 일도양단하는 의지를 가졌고, 그 초발심대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문화교화에 대해 안목이 있었다. 여의도교당 여의보주 편집인으로 시작해 원불교문인협회장을 맡아 전국을 뛰어다니며 각 교구 원문협을 조직할 만큼 불도저 같은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익산과 서울, 전북에만 있던 시절, 정기총회를 열면 서울에서 한 걸음에 달려오셨다. 어린이 성가 제작에도 참여하였고, 남지심 작가가 소설 《우담바라》를 쓰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필자가 기자 시절, 좌포교당에서 교리강습을 나고 있는 그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시는 힘이 무엇이냐”고 묻자 “나는 원불교를 만나 비로소 사람이 되었소. 진리를 알고 스승님을 모시고 사니 모든 일이 잘 되더라고요”라고 했다.
지난 5월20일 이후로 덕화만발 메일이오지 않았다. 아프시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곧 다시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보니 5월13일 글에 ‘해탈과 열반을 향하여’라는 글이 있었다. 병원에 가시기 전 자신의 열반을 미리 짐작한 듯 했다. 자신의 삶과 죽음, 해탈과 열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것 같았다.
죽음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로 죽음에 대한 이해, 가족과의 소통, 종교적 신념, 삶의 의미 찾기, 유언장 쓰기, 장례식 계획을 들었다. 그러면서 가장 큰 준비요 최고 경지는 ‘해탈과 열반’이라며, 그 방법으로 명상 보시 계율정진 경전공부를 제시했다. 특히 경전공부는 일원대도의 교리와 철학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한 생을 열정적으로 살다가 내생 준비까지 스스로 하셨으니 생전 천도를 하셨음에 분명하다.
덕산 김덕권 영가시여! 한 생 덕화만발 하셨으니, 그 만발한 꽃이 씨앗으로 영글어 다시 덕화억만발 하시기를 축원하나이다.
9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