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이란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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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파이란은 어디에?
  • 박동욱
  • 승인 2001.06.02 0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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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이것이 사랑의 특징이다.
그러나 많은 영화에서 사랑은 꿈결 같은 것, 혹은 집착과 좌절, 받아들여짐과 헤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파이란」은 이런 영화들과는 질이 좀 다르다. 어떻게 보면 ‘21세기 한국형 종교영화’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이란」의 주인공 최민식은 항구 마을에서 가난이 싫어 도시로 올라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배 한 척 사서 선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건달세계에 뛰어든다. 하지만 민식은 천성이 극악하지 못해 나이는 들고 후배들한테는 밀려 조직의 천덕꾸러기로 살아간다.
그런 민식에게 새로운 삶을 던져준 것은 ‘파이란’이라는 연변처녀다. 순결하기만 한 파이란은 부모를 잃고 한국에서 어떻게서든 살아가려고 위장결혼을 하는데 그 남편이 민식이다. 스쳐가듯 민식의 얼굴을 보고 사진한장 쥐어든 파이란은 시골의 세탁소에 심부름하는 일꾼으로 팔려가는데, 중개인의 농담으로 민식이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키우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결혼증명서에 붙은 민식의 증명사진을 뜯어 작은 액자에 넣고, 위장결혼이 아닌 진짜 남편으로 민식을 맞게될 그날을 꿈꾸며, 민식의 칫솔과 자신의 칫솔을 나란히 놓는다.
그러나 파이란은 중병에 걸려 죽게 되고 민식은 파이란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시골 마을에 내려오면서 파이란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리고 파이란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고결한 사랑이었는지 깨닫는다. 거기다 민식은 파이란의 절망을 해결해줄 마지막 사람이었으며, 파이란이 민식을 찾아온 그 순간 민식은 음란비디오 판매죄로 구속되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음도 알게 된다.
이제 민식의 꿈은 배의 선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간절하고 고귀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의 위대한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시작부터 계속되는 상스런 욕설, 그러나 그 욕설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민식보다는 덜하며, 민식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민식과 같은 파이란이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든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존재, 파이란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며, 불교의 부처님과 같은 존재다.
민식은 파이란의 고결한 사랑으로 새삶을 살게 된다. 민식은 파이란의 생명이 끝나서야 그 사실을 알듯, 우리도 우리 자신은 모르지만 법신불 사은께서 수천년 수만년 우리의 성불을 기도하고 기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다면 우리도 민식처럼 새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파이란의 편지중 가장 아름다운 대사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아쉬운점 이분법적인 이야기 전개, 시작 장면과 같은 완벽한 구성이 영화전면에 살아있지 못한 점, 극찬하고 싶은 점 한국영화사에 사실주의 사회 영화를 복원하려는 노력.
<박동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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