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한라에서백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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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한라에서백두까지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9.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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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종교 청소년 평화순례


윤성인 (오른쪽위)학생연합회장"홍제교당


2001년 8월6일 설레는 마음을 이끌며 70여명이 한라산 등정을 서둘렀다. 백록담이 보호기간이라 윗세오름에서 통일기원식을 했다. 내려오기 전에 우리는 한라산에서 흙과 물을 채취했다. 이튿날 새벽, 김포로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중국에 가기 위해서다. 중국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먼저 간 곳은 중국 심양시. 심양에 도착하자 밥을 먹었는데 듣던대로 중국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순례단은 심양현지에 있는 LG사 공장과 심양에 있는 고궁, 그리고 코리아타운이라 불리우는 서탑거리를 둘러본 후 통화시를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통화시는 심양시보다 별로 좋지않았다. 우리는 다시 집안시로 향했다. 중국집안시 현지 고구려 유적 박물관을 견학해 중국 역사학자에게 설명을 들었고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국내성 성터를 실제로 보면서 국사책에서만 보던 유적을 눈 앞에서 본다는게 실로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적이 너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국내성 성터는 그 옛날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 수도였는지 믿기지가 않을 만큼 초라하고 관리도 안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넷째 날 압록강을 갔다.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탔는데 바로 50m정도 앞이 북한 땅이였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조망 너머 북한 땅이 아니라 바로 앞에 북한사람들과 손짓으로 대화할만큼 가까운 거리다. 분단의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였다. 유람을 끝내고 다시 우린 마지막 목표인 백두산을 향해 통화시로 가야했다. 백두산은 차를 타고 가야했다. 지프차를 타고 백두산 천지를 향해 신나게 달렸고 백두산 올라가는 길은 정말 장관이었다. 백두산 중턱까지 올라 아래를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한참을 올라가 차를 세우고 30m쯤 올라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하게 했다. 말로만 듣던 천지가 있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여기저기서 사진기를 눌러댔고 나도 한장이라도 더 찍기 위해 노력했다. 백두산에서도 한라산처럼 통일기원식을 했고 백두산에서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는 한국에서 부르는 것과 느낌이 달랐다. 백두산을 내려와 장백폭포를 향했다. 장백폭포도 엄청나게 멋있었고 한국에서만 보던 폭포와는 수준이 달랐다. 백두산 천지의 물과 흙을 채취하고 연길로 떠났다. 연길시는 조선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라 거리 간판도 한국어로 되어있다. 연길에서 고속도로 타고 한두시간을 가니까 용정중학교가 나왔다. 용정중학교의 역사를 배우며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에 대해 듣고 , 우리 순례단과 용정중학교 학생간의 선물 교환도 있었다. 학생들이 다 한국어를 써서 중국에 온 기분이 안 들고 그냥 지방 한 도시에 온 기분이였다. 우리는 서로 인사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에서 마지막 하룻밤을 보내는데 좀 서운했다. 여섯째 날, 인천공항에서 이번 행사의 제일 중요한 ‘합수합토제’를 했다. 바로 한라산의 흙, 물과 백두산의 흙, 물을 합치는 행사였다. 이번 한라에서 백두까지 여행을 하면서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방송에서 ‘통일을 이루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뭐 이런 말들이 그냥 맨날 듣는 말인데라고 생각했지만 중국에서 바라보는 북한, 백두산을 보면서 통일이 되었으면 ‘북한에서 중국을 바라 볼텐데. 이것이 분단의 현실인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빨리 우리 나라는 꼭 통일을 이뤄서 세계에서 인정받으며 사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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