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현실과 치유책21세기와 신가족 시대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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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현실과 치유책21세기와 신가족 시대의 출현
  • 전재만
  • 승인 2001.11.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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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소장)


과거 대가족이 모여 살 때는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주거 환경 자체가 모든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저녁 10시쯤 되어 부모들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모든 일과가 끝났다. 예외가 없었다. 이른 아침 해가 동트기도 전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따라 동시에 기상을 해야 했다. 게으름을 피울 여지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은 생체 리듬이 같았다. 잠자는 시간만이 아니었다. 식사 시간이 같았다. 냉장고가 따로 없었다. 그러니까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없었다. 식사 시간을 놓치면 여지없이 굶어야 했다. 거기다 공동 식탁은 배고픔을 채우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온갖 훈계와 가르침이 뒤따르는 일종의 학습의 장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TV나 전화기도 한 집에 한 대 이상은 꿈도 못 꾸었다. 그러다가 가난이 극복되고 살 만한 여유들이 생기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 주택 구조가 바뀌었다. 각 방을 쓰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 달라졌다. 각 방마다 개인용 전화기와 TV가 생겨나고 컴퓨터가 설치되었다. 굳이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신세질 일도 없었다. 출퇴근 시간이 달라지고 식사 시간이 달라졌다. 각자의 열쇠가 생기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방해를 끼치는 일 없이 제각기 편리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잠자는 시간도 제각각, 집에 드나드는 것도 제각각…. 이래서 ‘호텔 가족’이란 말이 생겨났다. 곧 해체 가정을 지칭하는 말이다. 가족임에도 얼굴을 마주 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오죽하면 21세기의 가훈은 ‘얼굴 좀 보고 살자’로 바뀐다고 할까?
과거 주판적 수의 개념을 지녔던 진공관 세대에서는 획일적 사고를 했지만 전자 계산기적 수의 개념을 지닌 아날로그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중적 사고로 바뀌고 컴퓨터식 수의 개념을 지닌 디지털 세대에 와서는 다중적 사고를 하게 되었다. 사고 형태만일까? 정보 수집 방법도 달라진다. 듣고 기억을 해야 했던 진공관 세대에서 보고 기록하는 아날로그 세대로 그리고 검색어 하나만 알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 세대가 디지털 세대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진공관 세대의 가족 개념과 디지털 세대의 가족관에는 엄청난 차이가 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혼을 사회적 낙오와 지탄의 대상으로 삼던 진공관 세대와 달리 아날로그 세대는 이유가 타당하면 언제든 가능하다에서 이제는 이혼이 결혼의 혼수(?)가 된 세대가 디지털 세대다. 폐쇄적이기만 하던 성생활이 진보적인 성생활로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생활로 바뀌었다. 가사만해도 전적으로 아내 몫이던 것이 이제는 가사의 분담으로 변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오래 전에 미래학자들에 의해 예견된 일이었다.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닌 것이다. 알게 모르게 변화에 저항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면서 변화되어 온 것이다. 앞으로 우리 모두는 더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혈연을 이어가는 제도로서의 가족 개념은 점차 사라져 갈 것”이라고 예상한다. 21세기에는 혈연보다는 거주 형태 중심, 역할보다는 임무 중심의 ‘뉴 패밀리’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1일 가족이 늘어나는가 하면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물론, 자녀를 갖지 않고 부부 둘만 사는 가족이 증가한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보다는 행복한 독신이 낫다’는 사람이 늘고 ‘행복하지 않은 독신보다는 행복한 재혼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가족의 이합집산이 늘게 된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은 이미 구미 각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베커 교수를 비롯, 많은 사회학자들이 이 같은 현상을 ‘시간적 일부 다처제’, ‘연속적 결혼’ ‘할부 단혼’ 등으로 표현했다. 이혼과 재혼의 반복이 장기적으로는 ‘복혼’(폴리가미)을 의미한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런 가정을 빗대 “여보, 당신 아이하고 내 아이하고 싸우는 걸 우리 아이가 말리고 있어요”라는 따위의 조크가 생겨나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1998년 인구 동태 연보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이혼한 사람은 12만 3700여쌍이므로 통계상으로는 3쌍이 결혼하면 1쌍이 이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루 1005쌍이 결혼식장에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맹세하는 사이, 다른 339쌍이 가정 법원에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새로 결혼한 부부 중 약 10%는 재혼이다. 나아가 부모의 이러한 이혼으로 내팽개쳐진 미성년자는 무려 9만 8000여 명에 이른다. 뿐만이 아니다. 생명 공학 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가족 형태에 변화를 가져온다. 혼자 사는 여성이 인공 수정을 통해 아이를 갖거나 동성애 부부가 복제를 통해 아이를 갖는 경우도 생겨난다.
굳이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부부 관계는 불필요해진다. 이른바 사이버 섹스 시스템이 보편화된다. 사이버 섹스는 포르노그라피를 보는 것과 비슷한 측면이 많지만 수동적인 시청이 아니라 화면 속의 가상의 상대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문용어로는 인터액티브(Interacttive)한 소프트 웨어라 할 수 있다. 컴퓨터의 모니터와 키보드 대신 헬멧과 안경을 결합해 놓은 듯한 ‘비셋’이란 장치와 테이터 장감, 그리고 여성의 젖가슴이나 남성의 성기에 부착하는 특별한 기구들을 이용해 3차원 영상으로 성적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결국 문명의 이기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정을 파괴시키는 악으로 존재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가정에 대한 종교적 대응

기독교 입장에서의 반성부터 시작해 보자. 메이스(1976년)는 결혼과 가정의 필요에 대해 교회가 사역하는 데 이루어 놓은 부적당한 일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렇게도 많은 가정들이 -기독교 가정을 포함해서- 오늘날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람들은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기독교 가정들에게 그들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움, 지도와 지원을 주는 중요하고 큰 운동에 착수할 것으로 기대된다. 틀림없이 기독교인 가정 생활의 만연된 실패는 오늘의 세계에서 교회의 증인에게 심각한 일격을 가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어떤 프로그램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많은 교회와 밀접하게 일을 해 왔는데 반복해서 가정 생활의 주제가 화제에 올랐을 때 종종 차이점이 보이긴 했어도 자기 만족의 태도에 의해 당황했었다”
노만 라이트(1972년)는 가정에 대해 집중되어진 사역을 갖고 있는 교회가 보통보다 예외적이라고 지적했다. 셀(1982년) 역시 교회들의 문제가 가정의 필요들에 뻗치지 않고, 사역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가 왜 성도들 안에 있는 가정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를 몇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먼저 이 사역을 실행하는 데 대해 교회 스텝진들 가운데 부적당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신학교도 교과 과정에 기독교 가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끝으로 부분적이기는 하나 지역 교회의 임무가 너무 크다는 데 기인한다. 나눔과 섬김, 교육, 예배, 선교, 성경공부, 그리고 행정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는 가정 생활 교육을 하나의 자중되는 짐으로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핵심적인 것은 교회와 가정 사이에 경쟁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쥬리 골망은 수년 동안의 가정 사역 경험을 통해 가정이냐, 교회냐 하는 강박 관념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 혹은 가정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종종 있었다. 교인이 많고 주일 학교가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가정에는 그만큼 크게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경우가 없는 것 같다” 심지어는 교회의 가정 사역이 “새로운 우상 숭배”라고 비판되기도 했다. 이러한 반성은 다른 종파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제 주 5일 근무제의 정착 등으로 가정은 또 한 번의 소용돌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또 하나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가족해체와 우리의 과제

앞서의 가족 해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미래 예측 전문지 「퓨처리스트」는 미래 사회의 가족 형태에 찾아올 변화들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변화들이 가족을 파괴하는 쪽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희망 섞인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그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정이 위기에 처할 수록 사람들은 행복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진다. 그리고 그 행복을 빚어 내고야 만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19세기를 자유의 세기로 20세기를 평등의 세기로 진단하면서 21세기를 행복의 세기로 규정했다. 실제로 새로운 세기에는 여피족과 딩크족들이 나타나 가족 해체를 부채질할 줄 알았는데 슬로비족이 나타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잇다. 슬로비족들의 특징은 여피족들과 달리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바로 안정적인 직장과 행복한 가정, 인간적 가치다”라고 외치는 일이다. 따라서 일확천금이나 벼락출세에 기대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를 지향하는 것이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최근 한 주간지가 억대 연봉자들의 7가지 성공 비결을 조사한 결과 첫번째가 행복한 가정 유지였다는 점이다. 오래 전에 원양 어선은 여성을 배에 태우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가족을 승선시키기 시작했다. 출어 중에 여자만 보아도 재수가 없다고 했는데 가족들에 대한 염려나 가정이 깨지면서 불안해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자 아예 가족들에게 승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놀라운 일은 수확이 더 많아지면서 재수도 좋아졌다는 것이다.
사실상 위기가 없었던 시대는 없다. 가정이야말로 그 위기의 소용돌이에서도 여전히 보존되어 온 모든 인류의 행복의 불씨였다. 그 행복의 불씨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 세상이 와야 한다”라는 소망과 믿음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런 과제들을 해결해 가는 데 있어 어떤 점이 논의되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토론> 전남대학교 강사 안옥선

다양한 가족형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족제도의 원형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족제도는 인간이 생존의 과정에서 발전시켜 온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여타의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가족 제도이다. 농경 사회에서는 대가족 제도가 적합했듯이 산업 사회 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핵가족 제도가 유용했고 정보화 사회나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는 이에 적합한 가족의 형태가 있을 것이다. 가족의 기능 또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해 왔다. 과거에 가족은 생산 단위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 단위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그래서 혹자는 자본주의 시대의 가족을 ‘입’이며 ‘배출구’라고 하지 않는가). 불교의 연기, 공, 무아의 입장에서 볼 때도 우리는 특정의 가족 제도를 절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 사회, 문화 등의 여러 조건에 따라 적합한 가족 유형이 선택되어 왔듯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적합한 가족의 유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의 다원주의 시대라고 보면 바람직한 가족의 유형도 획일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양한 가족의 유형들에 대하여 관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만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기본적 윤리 이념은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이념은 ‘평등에 근거한 상호 존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에 근거한 상호존중
남방부 초기 경전에서 재가인의 윤리를 설명하고 있는 시갈라경은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이러한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시갈라경은 당시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역할과 상호 책임을 전제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져야 할 공통적인 윤리 이념으로서 평등에 근거한 상호 존중 또는 상호 배려를 말하고 있다.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가족 유형을 모색해 가는 데 있어서 불교 윤리는 평등에 근거한 상호 존중이라는 가족 이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한다.
1) 가족의 범위가 혈연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설정될 수 있다. 시갈라경은 가족의 개념을 부부나 부모와 자녀 관계에 국한시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혈연 밖의 친구들, 스승과 제자, 집안의 일꾼들, 출가 수행자들에 대해 배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어서 혈연에 국한되지 않는 확장된 공동체로서의 가족 개념을 시사하고 있다.
2)부부 관계는 계약 관계일 수 있다. 모든 인간 관계에 적용되는 상호 배려의 원칙은 부부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남방부 초기 경전에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는 부부간의 원칙은 평등에 근거한 상호 책임과 상호 배려에 근거한 계약적 관계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쪽에 대하여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며 부당한 대우가 계속될 때 그 계약이 파기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타카』의 한 이야기는 부부간의 관계를 계약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랑 없는 결합은 고통을 가져오니’ 사랑이 식어 버린 이를 위로하기 위해 머무르지 말라고 한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나무가 열매 잃은 것을 발견하고 버리고 떠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상호 배려가 유지되지 않고 부당한 억압이나 박해가 행해질 때 관계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원칙적으로 이혼에 반대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3)자비를 권유하면서 ‘외동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자비의 모형으로서 예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가족은 자비의 성품을 기를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인 관계이기에 그 의미 또한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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