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종교의 역할’중 평화문화의 창조-박성준 박사 " 움직이는 학교 대표, 성공회대겸임교수, 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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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종교의 역할’중 평화문화의 창조-박성준 박사 " 움직이는 학교 대표, 성공회대겸임교수, 평화학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09.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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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아셈 민간포럼 워크샵 " 9월9일 국가 인권위원회 배움터


박성준 박사


1. 제도" 조직의 영성(spirituality of institutions)
spirituality는, 비록 여전히 모호하고 정의하기 어렵긴 해도, 이미 종교인이나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제도나 조직에 관련해서도 spirituality가 거론 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조직이나 단체의 목적과 정신, 가치체계, 구성원리 등에 관하여 그러한 것들의 영적 정신적 차원를 평가하고 논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영성론적 개념과 범주를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NGO의 영성, 시민사회단체의 영성 또는 노동조합의 영신적 측면을 말할 수 있으며, [NGO 활동가의 영성]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은 전통적인 종교의 신앙체계에는 걸맞지 않겠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삶의 어느 부분이나 측면에 모종의 영적 차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어떤 사람(들)의 영성은 그가 자기(또는 집단) 속의 영적 에너지 혹은 혼의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긴밀히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일상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해방적 영성 대 억압적 영성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지닌 spirituality의 성격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영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해방적 성격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억압적 성격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예로 예수와 그 제자들의 집단을 들 수 있겠고 후자의 예로 미 부시행정부의 대테러 전쟁 정책 추진 팀(그 구성원은 부시, 딕 체이니, 럼스펠드, 라이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정책에는 영적 측면의 비중이 (아마도 오사마 빈 라덴의 경우에 못지 않게) 크게 두드러지는데, 그 성격은 해방적, 평화적이기보다는 억압적, 폭력적이며, 심지어는 [악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NGO의 영성의 경우에도 그것이 해방적인가 아닌가를 따져볼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 가운데도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직원리와 구조, 분위기와 관행을 가진 단체가 있는가 하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부단히 스스로를 쇄신해가는 단체도 있을 수 있다. 예수집단은 오늘의 교회와는 달리 [비제도화, 비권위주의, 전복적성격, 바람처럼 자유로움, 자기쇄신의 능력]을 그 영성적 특징성으로 지닌 지극히 매력적인 단체였을 터인데, 이 점에서 예수집단은 오늘날의 교회보다는 오히려 NGO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단체나 여성단체, 평화운동 단체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월터 윙크는 그의 삼부작 ‘The Powers’ 의 제3권에서 특별히 ‘제도조직"기구)의 영성’이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명제는, 신약성서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초등학문을 가진 자들과 권세자들]이라 불렀던,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그 자들은 실재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성서시대의 사람들은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제도와 기구의 심장부를 겨냥하여 그 영적 성격을 분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권력의 영적 측면은 단순히 제도나 조직의 성격을 의인화한 것만은 아니다. 그 권세자들이 의인화한 모습으로 우리들에 의해 지각되건 지각되지 않건 간에, 그 권력의 영적 측면은 엄연히 존재한다. 어떤 제도나 조직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제도나 조직은 실제로 영적 에토스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조직 생활의 이러한 면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그는 나아가 귀신들과 권세자들이라는 전통적 표현이 하늘이 맡겨준 임무를 배반하고 이 세상의 ‘지배체제’에 복무하는 제도들과 구조들의 영성을 실제로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윙크에게 있어서 ‘institution’이 의미하는 바는 인종주의, 나치즘, 분리주의,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세력들이다. 예컨대, 교회에게 위탁된 본래의 임무는 그러한 악마적 세력들에 저항하고 대결하는 것인데, 많은 경우 교회는 그러한 자신의 임무를 방기했거나 멀리 일탈하고 있다.
어떤 단체나 조직이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기본적 임무를 망각하거나 그로부터 일탈했을 경우, 조직에 내장된 자기성찰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그러한 비정상의 상황을 분별하여 경고를 발하고, 과오와 일탈을 극복하고 본래적 임무로 복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점은 개인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나 단체나 집단의 생활에 있어서나 공통되는 것이다. 오늘날 NGO 단체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조직의 이러한 영적 측면에 대한 요구와 반성의 소리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내가 [NGO 활동가의 마음공부] 라는 제목으로 아래의 글을 썼던 것(월간 ‘참여사회’ 2001년 3월호)은 그런 요구의 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말을 줄이고 남의 이야기에 조용히, 깊이 귀기울이는 지도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온후한 표정의,
그러면서도 유능한, NGO 활동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럴까?
NGO의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이,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의 여늬 지도층과 마찬가지로,
굳어져버린 표정에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말투와 제스춰를 배워버렸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몸과 마음에 평안과 휴식을 가져다 주는 고요한 명상과 내면의 성찰은
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운동가와 NGO 활동가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활동가들이 일에 지치는 것은 건강문제나 육체적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에 마음의 건강과 영적(정신적) 발전에 힘쓰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정신의 부실이 육신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
간디는, 중요한 사회적 행동을 앞에 두고는 반드시 그 준비를 위해 고독한 명상, 기도,
때로는 단식을 했다고 한다. 간디만이 그랬던 것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훌륭한 많은 NGO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적 변혁을 위한 성찰과 정진으로부터 얻은 것만큼 만 사회운동에 쏟아 부을 수 있을 뿐이다.

2. 평화의 문화(Peace Culture" Cultures of Peace)
나는 "예언자적 경청"이라는 말을 엘리스 보울딩에게서 배웠는데, 그녀는 최근의 역작 [‘평화의 문화’- 역사의 숨겨진 측면]에서, 전쟁과 폭력의 문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역사의 저류를 형성하며 맥맥히 흘러온 ‘평화의 문화’, ‘평화운동의 역사’를 탁월한 접근법으로 증언하고, 21세기를 보다 평화로운 세기로 만들기 위해 ‘평화를 이룩하는 활동들’을 어떻게 전개할 지에 대해 그녀의 풍부한 ‘경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엘리스 보울딩에 따르면, ‘평화의 문화’란 무엇보다 먼저 "평화로운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문화이다. 평화의 문화는 삶의 방식, 신념체계, 가치관, 행동 패턴 등을 포함하며, 서로 돌봄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제도적 보장을 동반한다. 평화의 문화는 또한 차이(서로 다름)의 존중, 봉사정신, 지구 자원을 모든 중생들과 인류사회의 멤버들 간에 평등하게 나누어 쓰는 일을 포함한다.
평화의 문화는 모든 차이와 다양성 안에서 인류가, 종과 개체의 심오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또한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체인 지구와의 혈연 의식을 느끼면서, 상호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러한 문화이다. 우리가 이런 문화를 이룩한다면, 거기에는 ‘폭력’은 있을 수 없다. 폭력이 발붙일 토양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적으로 잔인해 질 수 있고 야수처럼 흉포해 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평화의 문화를 창조해 누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평화로움’는 행동적 개념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위한 복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쉬임없이 생활세계를 변화시켜나는 가운데, 상호이해와 행동양식, 상황과 제도 등을 끊임없이 새로 만들고 다시 고치고 또 새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창조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문화는 소위 스테레오 타입의 평화와는 질을 달리 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평화는 지루함, 무미건조, 비현실, 무능력, 비활동성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그래서 ‘평화’를 말하면 하품이 나오고 졸리게 되곤 한다. 그러나 ‘평화의 문화’는 그런 정태적, 비행동적 평화개념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평화문화의 평화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평화요, 자기 쇄신의 과정으로서의 평화요, 평화를 지키고 이룩하기 위한 지난한 싸움 가운데 있는 평화요, 모험과 탐구, 미지의 영역으로 진출하려는 용기와 의지로 충만한 그런 평화이다.
평화의 문화는 ‘평화의 영성’을 간직하기 마련인데, 평화의 영성의 해방적 성격은 위의 설명에서 해명되었으리라. 평화의 영성은 사람과 중생을 먹이고 보살피고 섬기는 살림의 영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평화로움]은 NGO와 사회운동이 바람직한 규범으로 삼아도 좋을 만하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는 자기 성찰의 메커니즘이 건강하게 작동하고 그 조직과 구조와 사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다시 고쳐 만들어내는 그런 활동과 환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평화문화를 창조하는 쉬임 없는 노력의 과정은 다양한 수준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한 개인의 내면적 자기성찰과 수행과 훈련의 수준이 있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구, 이웃, 직장동료 사이의 사회적 교제의 차원이 있고, 한 도시의 주민운동체로부터 국제연합(UN)에 이르는 시민사회운동의 누진적 관계의 수준들과 관계망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도 그 한 부분인 우주적 생명세계와의 교섭과 상호작용이 포함될 것이다. 그 수많은 수준들의 간단없는 상호작용과 상호침투 가운데서 평화를 이룩해가는 사회적 능력은 개인과 개인상호간, 집단, 국가, 국제사회, 지구환경 등의 상호관계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의 패턴과 문화를 만드는가에 달려 있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연 속에는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두 사람도 똑 같지 않다. 그러므로 평화문화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기초 위에서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방법과 수단은은 평화, 나아가 ‘비폭력적 평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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