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덕 교무가 들려주는 초기 서울교화 약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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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덕 교무가 들려주는 초기 서울교화 약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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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1.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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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교화, 30년간 단일교당 유지
대종사는 한달에 한번 이상 경성에 오셨다. 대종사는 3등열차를 즐겨탔는데 역전에 나타나면 물살 갈라지듯 길이 났다. 대종사 경성에 자주 오는 것은 시국을 관망하고 정확하게 시세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교화에 힘쓰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황정신행이 춘원 이광수를 입교시키려 애썼다. 세 차례나 청함에도 대종사 응하지 않았다. 겨우 춘원의 부인 허영수에게 제만(濟晩)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제도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대종사는 “그 사람이 아만이 잔뜩 차서 무슨 말을 해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며 “내가 오더라도 안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춘원의 사람됨을 알아보았고 설혹 그가 불법연구회에 입회한다 하더라도 그 미칠 영향을 헤아린 것이다.

서울 이북 북방교화 주력하지 않아
대종사는 해방이 될 것과 환장세계(6·25)가 벌어질 것을 예언하였다. 그래서 서울 이북의 북방 교화와 해외 교화에 주력하지 않았다. 반면에 부산 교화에 대해서는 “부산 회원의 심리가 단순 솔직하여 대창할 것”이라고 하여 미상불 4년만에 3개 교당이 설립되었다.
서울은 30년간 단일 교당을 유지하였다. 창신동출장소에서 앵두나무골 경성지부, 해방뒤 한남동 정각사, 그리고 용산 용광사를 불하받아 오늘날의 서울교당이 되었다.
개성교당 교화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처음에 선죽교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바지의 덕암동 교당, 그리고 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여 북암동에 최고 좋은 한옥을 매입하여 교당으로 썼다. 초대교무 김영신 교무대에 평양에 교당을 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대종사의 반대로 중지되었고 그 일에 미련이 남아 있는 김 교무는 총부 공익부장으로 전보되었다. 서울에 2개 교당으로 불어난 것은 동란 뒤의 일이다. 서울로 피난 온 개성 교도들이 용산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시내 중심가에 교당을 마련하였다. 그것이 필동(중구)교당이고 이어서 인사동(종로)에도 교당을 내었다.
서울과 개성 교도들이 일심합력하여 봉공 정신을 발휘한 것은 해방 직후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통해 그 저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운동의 선봉에는 정산 종법사 다음으로 교단의 제2인자인 수위단 중앙 주산 송도성 총무부장의 활약이 크다. 그는 서울교당 초대 교무였다.
열정의 사나이 송도성 총무부장은 전재 구호사업을 통해 대종사의 경륜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해방 전에 두만강을 침범한 소련군을 피해 남하해 온 피난민들이 군산항을 거쳐 이리역에 몰려왔을 때부터 구호사업을 하기 시작하여, 해방직후 서울, 전주, 부산으로 확대하였다. 특히 서울 전재동포구호소는 주산 총무부장이 선두에 나서 불법연구회 시대 마지막 장에 온 열정을 다 바쳐 웅혼 장렬한 모습으로 순교하였다. 주산은 우리 회상의 영원한 청년상이다.

서울교당에 재가교무 발령
서울교당에서 교단사적으로 특기할만한 일이 있었다. 대종사께서 <약자가 강자되는 법문>을 설하셨고, 서울 교도들과 금강산 여행을 하셨고, 은자시자녀법을 시행하셨고, 재가교무를 발령하셨다.
이동진화, 이공주는 재가회원시 교무 발령 받아 출가하였다. 서울에서 세 번째로 입교한 성성원은 경성교무로 발령받았으나 실무를 보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주산 총무부장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교도 성성원이 문병을 왔다. 주산은 문병을 받는 입장이면서도 단정한 차림에 정좌하고 “언제쯤 그거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언제였던가, 성성원은 주산에게 가정을 청산하고 전무출신할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산교무는 경성고녀를 나온 신교육 받은 분이 이 사업하면 참 잘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대종사는 중학교를 나온 여제자 10명만 있으면 여성지도자로 양성하여 전조선 여성을 교육시킬 궁리를 하였다. 경기고녀 나온 김영신과 기전여학교 중퇴한 조전권이 있지만 두 사람만 가지고 안된다. 그런데 고등과정을 마친 거개 여성들은 자기 살림살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정녀제도를 만들었다.
여러분은 심고할 때마다 부디 ‘성불제중하여 주사이다’ 기도한다. 성불제중이란 보은 봉공생활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그거 언제쯤 되겠습니까? 여기서의 ‘그거’는 봉공활동을 말한다. 진정한 봉공인은 무아(無我)가 되어야 한다. 무아봉공인이 바로 공도자이며 그가 바로 전무출신자이다. 출가하여 교학과를 나와 공도 생활하는 것만이 전무출신이 아니다. 봉공활동에 무슨 조건이 있고 학력이 필요한가. 전무출신은 제도화의 개념이 아니라 행위개념이다. 판 안에 묶여 있으면 그 교단은 곪는다.
봉공활동은 ‘언제 그것’이라고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행이다. 나중에 자식 다 키우고 늙어 힘없을 때는 그런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 여기 무아삼매 지경의 행을 나투는 것이 봉공생활이다. 자기에 묶여 복닥복닥 살다보면 평생 다람쥐 체 바퀴 생활이다.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회상의 영원한 청년 주산종사가 묻는다. 여러분 그거 언제쯤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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