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가시던 대종사, 아들보며 "아따 그 놈, 참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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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가시던 대종사, 아들보며 "아따 그 놈, 참 잘생겼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4.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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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단, 용신 마령교당서 공양주 생활 최선주 할머니
그 때가 8월 보름쯤이었나. 마령지부에서 큰 아들을 업고 이리(현 익산시)를 갔었지. 총부 대문을 들어서는데, 마침 대종사님께서 치과에 가신다며 인력거를 타고 나오셨어. 나를 보고선 ‘어떻게 왔냐’고 물으신 후, 업고 있는 우리 큰 아들을 보고 ‘아따 그 놈, 참 잘 생겼다’고 하시곤 다시 길을 떠나셨어.”
결혼 후, 거의 평생을 원불교와 인연된 기관에서 살아온 최선주 할머니(호적명 분순, 84세)에게 대종사의 첫 인상은 “무서웠다”로 표현된다. 아마 ‘큰 어른’ 혹은 ‘생불님’이라는 생각이 뇌리 가득 담겨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듯하다.
정읍에서 태어나 15세에 결혼, 부부가 함께 용신교당에서 박대완 선생을 모시고 교당 일을 하며 살았던 이들 부부. 여기에서 이들 부부는 대종사를 처음 뵙고, 또 설법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이제 하도 까마득해 그 당시 법문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새 부처님을 뵌 기억만이 역력할 뿐.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박대완 선생이 마령지부로 발령받아서 따라갔지. 그런데 이내 박대완 선생은 다시 용신교당으로 돌아가고, 우리 부부는 거기서 한 4년간을 서대인 선생을 모시고 살았어. 그때 서대인 선생이 급히 총부를 갔는데, 우린 뒤늦게 대종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때 눈물도 많이 흘렸지”
“대종사님이 직접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자랑하는 할머니는 애들이 크면서 교당 생활이 어려워 다시 박대완 선생이 있던 용신교당으로 돌아갔다가, 팔타원 황정신행 선진을 소개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을 돕다가 당시 황정신행 선진의 땅과 별장이 있던 현재 한국보육원(양주시 장흥면 소재) 자리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지금까지 거의 평생을 살아온 최 할머니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황정신행 선진의 아들 강필국 선생과 이공주 선진의 아들 박창기 선생의 죽음이었다. 6·25동란 당시 안전한 피난처로 여긴 강필국 선생이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그 뒤 박창기 선생과 함께 숨어 지내다 희생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할머니는 평생 황정신행 선진에게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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